'블랙데이'를 맞으며… 짜장면을 생각하다

입력 2015-04-11 05:00:00

"이내 말을 들어보소∼" 짜장면의 독백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그룹 god의 데뷔곡 '어머님께'의 랩 일부)

추억의 랩소디가 아니다. 하지만 그 시절 아련한 추억을 담고 있다. 어머니도 먹고 싶었지만, 아들이 먹는 모습만으로도 배가 불렀던 시절이다. 짜장면은 1960, 70년대에는 로망이었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흔하디 흔한 중국식 메뉴 중 하나일 뿐이다.

요즘 짜장면의 위상이 말이 아니다. 그래도 짜장면은 짜장면. 시대의 흐름 속에 인기를 누리는 짬뽕보다는 형님 격이다. 여전히 '짜장과 짬뽕'이지 '짬뽕과 짜장'은 아니다. 단체 주문할 때도, "짜장 먹을 분?"을 먼저 물어본다.

국민 음식, 짜장면. 며칠 후면 마침 '짜장면이 주인공인 날' 블랙데이(4월 14일)다. 속뜻은 별로다. 연인들의 특별한 날인 밸런타인데이(2월 14일), 화이트데이(3월 14일)가 지나고 짝이 없는 남녀 무리가 짜장면으로 그 서러움을 달래는 날이다.

짜장면은 문화 코드다. 진작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현재 중년의 남자라면 누구나 짜장면에 대한 추억이 있다. 졸업식날 학교 인근 짜장면집은 꽃다발을 든 졸업생과 학부모로 북새통을 이뤘다. 이 세대가 성인이 되고서 이삿짐을 나르느라 허기진 배를 채워주던 음식도, 당구장 환희의 순간을 함께한 음식도 짜장면이었다. 정부도 국민 음식인 짜장면을 '문화'로 인정했다. 짜장면이 이 땅에 자리 잡은 지 100여 년이 지난 2006년 7월 문화관광부가 외래음식 최초로 짜장면을 '한국의 100대 문화 상징'으로 꼽았다. 더불어 짜장면을 중점 물가관리품목으로도 선정했다. 이번 주엔 '짜장면의 사회학'을 주제로 정했다.

홍준표 기자 agape1107@msnet.co.kr

◇한국 온 지 110년, 한때는 귀족 음식…지금 내 처지 이게 뭐꼬?

"한때 잘나갔는데…, 지금 뭐꼬 이게?"

내 이름은 짜장면이다. 내 나이는 나도 모르겠다. 생일도 모른다. 누군지 모르지만 국적 없는 '블랙데이'(4월 14일)만이 나를 조롱하는 듯한 기념일로 정해져 있다. "요즘 내 신세를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그렇지 뭐~~'라는 생각이 든다. '에라, 짜장면 같은~~' 이런 소리가 나오는 걸 보면 달관해야 할 때가 맞다."(잔뜩 짜증난 표정의 짜장면)

#1. "본적은 있는데, 호적이 없어요."

호적은 없지만, 본적은 분명히 있다. 중국 산둥성이다. 활동 영역은 대한한국 전역과 각국 코리아타운의 중식당. 내가 몇 살 먹었는지, 내 생일이 언제인지 손꼽을 시기도 훌쩍 지났다. 다만, 한국으로 귀화한 지 110년째라는 정도만 알고 있다. 2005년 10월에 한국인들이 나의 귀화 100주년을 축하해줬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살아온 만큼 삶도 굴곡이 많았다. 내 고향 등지고 이역만리 타향살이가 오죽 힘들었겠나. 고향 중국과 달리 대한민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는데, 지금은 대우가 영 시원찮다. 고향 생각이 나지만, 그렇다고 떠날 수도 없는 이내 신세여∼∼.

#2. 서얼인 '짬뽕'에게도 밀려

중국집 서얼인 짬뽕이 내 턱밑까지 치고 올라왔단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짬뽕은 내 상대가 되지 못했다. 지금 내 형편이 짬뽕에 치이는 '찌질이' 같아 보이겠지만 내게도 영광의 순간이 있었어.

지금은 커피전문점의 '카페라테'보다 싸지만, 한때는 나도 호사스러운 성찬이었다고. 1905년 개업한 '산둥회관'(1912년 '공화춘'으로 개명)에서 내게 처음으로 '짜장면'이란 한국식 이름을 지어주었을 때만 해도 귀하신 몸이었다. '공화춘'은 당시 최고급 청요릿집이었지.

일제강점기, 해방 직후까지도 난 귀족 음식 대접을 받았지. 미국의 밀 원조를 통해 원재료가 저렴했을 때도, 요즘처럼 값싼 음식이 아니었어. 1960년 처음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할 당시에도 한 그릇에 15원 정도로 몸값이 비쌌어. 서민들은 쉽게 넘보지 못할 가격이었지. 1963년 20~30원 선, 1968년에는 50원이었는데, 1963년 화랑 담배 한 갑이 5원, 1965년 시내버스 요금이 8원이었으니 알 만하지?

#3. "짬뽕, 나대지 마! 난 문화코드라고∼~"

미국의 원조 곡물을 소비하기 위해 1970년대 정부는 혼'분식 장려운동(1967~1976년)을 펼쳤어. 그전까지 귀하신 몸으로 대접받던 내 신상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어. 그렇다고 내 영광의 순간이 끝난 건 아니었다고.

1970년대 후반부터는 서민을 대표하는 음식 아이콘으로 자리를 잡았어. 그만큼 나를 찾는 이들이 더 많아졌다는 이야기이지. 그 덕분에 한국인은 나와 얽힌 추억이 그득해. 이러니 나를 빼놓고는 한국 문화를 말하기도 어려워졌던 거지.

그룹 'GOD'는 1999년 1집 타이틀곡 '어머님께'라는 곡에서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라는 가사로 큰 히트를 쳤어. 영화 '북경반점'(김의석'1999), 연극 '짜장면'(김상수'1993), 동화 '짜장면'(안도현'2000), 가요 '짬뽕과 짜장면'(철가방프로젝트'2002), 만화 '짜장면'(허영만'1998) 등 나를 소재로 한 작품들도 쏟아져 나왔지."

#4. "한국 성형수술 1호! 알랑가 몰라?"

이건 여담인데 사실 내가 한국 성형수술 1호란 건 몰랐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군대를 따라온 40여 명의 상인과 함께 한국땅에 첫발을 디뎠을 당시 내 모습은 지금처럼 까무잡잡하지 않았다고. 한국에서 적응해 살아가면서 내 모든 것이 바뀌었어. 모습까지도.

중국에서 내 이름은 '작장면'(炸醬麵'중국 발음으로 짜지앙미엔). 한자 뜻 그대로 장을 볶아 국수에 얹은 게 본디 내 모습이야. 중국 사람들은 나를 만들 때 '춘장' 대신 '첨면장'(甛麵醬)이라는 중국식 된장을 사용했어. 지금의 내 모습과는 달리 색도 맛도 전혀 달랐던 거지.

한국에서 성형외과의 시초가 언제인지 아니? 1960년대에 미국에서 성형외과를 정식으로 이수한 유재덕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 세브란스병원에 성형외과학 교실을 만든 때부터야. 나는 이보다 앞선 1948년 식품회사 영화장유에서 내놓은 '사자표 춘장' 때문에 검고 반질반질한 윤기를 얻게 된 거야.

자, 이제 나의 회고담을 끝낼 때인가? 한마디만 더 하고 끝내도 될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해놓고선 너무 자기 자랑만 한다고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요즘은 자기 PR 시대'라고 누가 그랬잖아. 안 그래도 서러운데 내가 내 자랑 좀 한다고 나쁠 건 없잖아? 대한민국 국민이 앞으로 짬뽕만 사랑할지도 몰라 불안해. 매일 밤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라고. 어느새 내 자릴 위협하는 짬뽕이 앞으로 10년 후에는 '내가 중국집 적자다'라고 우길지 누가 알겠어? 110세 된 내가 부탁할게. 나도 계속 사랑받고 싶다고, 제발~."

홍준표 기자 agape1107@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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