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발자국 소리들은 나를 땅 밑으로 기어 들어가게 만들 테지만 너의 발자국 소리는 땅 밑 굴에서 나를 밖으로 불러낼 거야! 그리고 저길 봐! 저기 밀밭이 보이지? 난 빵을 먹지 않아. 밀은 내겐 아무 소용이 없는 거야. 밀밭은 나에게 아무것도 생각나게 하지 않아. 그건 서글픈 일이지! 그런데 너는 금빛 머리칼을 가졌어. 그러니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정말 근사할 거야! 밀은 금빛이니까 나에게 너를 생각나게 할 거야. 그럼 난 밀밭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사랑하게 될 거야.(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중에서)
서점에 들렀습니다. 책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풍경은 아름답습니다. 넓은 서점을 둘러보다가 걸음을 멈춘 곳. 어릴 때, 조금 자랐을 때, 다소 자랐을 때, 그리고 제법 나이를 먹었을 때, 그때마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 책이 거기에 여전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내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인 '사랑하며 사는 것은 생각하며 사는 것보다 의미 있는 일이다'를 처음으로 쓰게 만들었던 '어린 왕자'.
'도대체 사랑이 무엇일까요?' 나이가 들 만큼 든 지금도 여전히 난 그 질문에 대한 완벽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살아오면서 그 시간 동안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감정을 경험하면서도 여전히 그 본질적인 의문에 대한 정답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온 시간이 나에게 가르쳐 준 사랑에 대한 하나의 진실. '사랑은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 지식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 사랑이기에 사랑이 그리는 풍경도 제각기 다릅니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그것을 '길들인다'는 의미로 나타냅니다.
밀은 여우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린 왕자가 여우를 길들였으니까요. 황금빛으로 물든 그 밀밭으로 인해 어린 왕자의 금빛 머리카락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결국 여우는 '밀밭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길들인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다시 읽으면서 묘한 느낌을 다시 받았습니다. 여우는 왜 '어린 왕자'를, 또는 '밀밭'을 사랑한다고 하지 않고 '밀밭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했을까요?
그건 물론 비밀입니다. 나에게도 비밀이고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비밀입니다. 길들임은 바로 비밀 그 자체니까요. 그러면 비밀은 무엇일까요? 비밀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고개를 갸우뚱하거나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 비밀입니다. 아니, 정답이 있다 하더라도 정확하게 말로 전달할 수 없는 것이 비밀입니다. '소중한 건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니까요.
어떤 방식이 가장 아름다운 교육일까요? 교육현장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대답은 더욱 어렵습니다. 최근 인문교육에 대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 인문교육에 대한 대화를 했습니다. 대답은 대체로 일치합니다. 당연히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방법에 대해서는 제각기 다른 풍경을 그립니다. 지금 학교교육에서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미 하고 있는 것을 뭐 그리 요란을 떠느냐고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모든 학교수업에는 인문교육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아이들은 진정 행복하지 않습니다. 인문교육이 주목하는 지점은 바로 거기입니다. 모두에게, 그리고 어디에도 존재하는 그것이 왜 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을까요? 인문교육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누군가가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지금 너는 무슨 일부터 시작할 것인가?'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비밀이야'입니다. 어쩌면 그 답은 질문하는 당신의 가슴에 있으니까요.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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