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내가 살던 앞바다에는 왕의 무덤이 있었는데 그곳은 파도가 거세 한 번도 가까이 가 본 적이 없었다. 여학교 때는 신라왕들의 무덤 사이를 거닐며 갈래머리 문학소녀의 꿈을 키우기도 했는데, 오래전 그곳을 떠나 살림을 마련한 여기도 무덤이 많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 무덤이란 고향을 떠올리는 둥근 기억 같은 것이어서 스무 해가 넘도록 무덤을 오르내리며 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곳 사람들은 무덤을 지키기 위해 팔베개를 베고 생각이 깊어져, 밤이면 그쪽을 향해 잠이 들고. 그 옛날 왕이 살았던 흔적들은 삶과 섞여 걸음 닿는 곳곳마다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곳은 살아있는 자보다 죽은 자가 더 오래 남아서 비단 옷을 입고 굽 높은 그릇에 밥상을 받는 신비로운 곳이다. 아직도 그 신비는 다 벗겨지지 않아 발굴팀이 자주 드나들어 잊어버린 기억들을 더듬고 있다. 아득한 시간 속에서 봉분을 지켜온 대가야 사람들에게 무덤은 어둡고 두려운 죽음과의 연결이 아니라 어디서든 깃발이고, 위안이고, 고향이다. 그렇기에 해와 달이 무덤 속으로 수시로 드나들고, 밥 짓는 연기 피어올라 그들의 살림살이가 달그락거리고 아이들은 태어나 젖을 먹고 있다.
뭔가 잘 풀리지 않을 때 무작정 걷는 버릇이 있어 어느새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무덤 곁에 와 있다. 그곳은 아늑한 생각의 집 같기도 하고, 푸른 녹이 짙은 오래된 언어 같기도 해 어수선했던 마음을 가라앉게 해준다. 그러기에 이곳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시의 꿈을 이루기도 했으니, 고분은 나를 다독거려주는 커다란 손길이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옛사람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무덤이 등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것을. 대가야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이곳을 한 바퀴 돌아갈 적마다, 오래된 왕국의 후예라는 것을 부적처럼 품고 오늘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힘들 때마다 출렁거리는 능선을 바라보면 봉긋하게 부풀어 오른 무덤 사이로 새 풀이 돋고, 그 풀 위로 소롯한 길이 살아나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해 준다.
이제 거리는 푸르고 붉은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다. 머지않아 '대가야의 융성'을 알리는 잔치가 열린다. 저마다 곱게 개어둔 비단옷을 꺼내 입고 이마에 띠를 두르고 상을 차려 손님을 청하려 한다. 이곳에서는 조상이 남긴 시간 속을 거슬러 본래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기도 하고, 지금으로 돌아 나오는 출구를 만나게도 될 것이다. 대가야 사람들은 이미 본유금유(本有今有)라는 의미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오늘도 머리에 무덤을 이고 다닌다.
이 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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