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과 전망] 말발과 약발

입력 2015-03-25 05:00:00

발본색원, 비리 근절, 부패 척결, 규제 길로틴, 적폐 덩어리, 암 덩어리, 사생결단….

말이 넘쳐난다. 날이 시퍼렇게 선 말이다.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을 해도 모자랄 판에 험구가 연일 넘쳐난다.

말의 인플레다. 화폐 발행이 많아지면 돈 가치가 떨어지듯 험한 말이 넘쳐나니 말하는 이의 위신도 떨어진다. 아무리 목청 높여도 꿈쩍도 않는다. 톤은 더 올라가고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핏대만 선다. 피로만 쌓인다.

한마디로 말발이 서지 않는다. 보통으로 안 되니 세게, 세게만 주문한다. 그래도 별로 효험을 볼 수가 없다.

요 며칠간 대통령이 앞서면 국무총리가 뒤를 따르고, 국무총리가 바람을 잡으면 대통령이 가세를 한다. 부패와의 전쟁이란다. '왜? 갑자기'라는 의문을 가져보지만 쏟아내는 말들의 수위가 너무 높다. '동네북' 포스코를 시작으로 만만한 기업들 이름이 굴비 엮듯이 줄줄이 이어져 나온다. 분위기는 이들 기업이 필시 큰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다.

예정된 수순처럼 검찰뿐 아니라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국가정보원까지 사정기관 간부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는 장면이 나온다. 1980년대와 1990년대의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연상케 한다. 본연의 업무이자 존재의 이유인 일을 하는데 따로 대책회의가 왜 필요한지, 기념촬영은 왜 하는지, 생색은 왜 내는지 의문이다.

칼자루를 쥐고 있으면서 휘두르지 않으니 손바닥에 땀만 채이나보다. 가만히 있자니 손이, 어깨가 근질근질한가보다. 그래도 그렇지 허공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칼을 휘두르는 것만 같아 안쓰럽다.

시곗바늘을 현정부가 시작된 3년 전으로 돌려보자. 지금 거론되는 비리 시리즈는 이미 그때 알려진 것들이다. 새로울 게 없는데 호들갑을 떤다. 또 현정부 들어서 쏟아져 나온 말들은 얼마나 현란하고 부품했던가. 전에 없이 강력하고 비할 바 없이 단호했다. 그러나 기대는 실망으로 변했다. 경제민주화, 비리청산, 창조경제, 100% 대한민국. 아무리 정치적 구호라고 해도 비슷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 많고 많은 말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 현실이 된 일이 있는가. 지금까지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 쏟아지는 말들을 곧이들으려 하지 않는다. 면역력이 생긴 탓이다. 말발이 안 서니 약발도 받지 않는다.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말의 가치를 높이는 것밖에 치료법이 없다. 말이 곧 현실이 되는 걸 보여주면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내 손으로 쥐어야지, 내 눈으로 직접 봐야지 믿는 법이다. 말의 인플레가 괜히 생기는 게 아니다.

1999년 개봉한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에는 "나는 오직 한 놈만 팬다"는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주인공 무대뽀(유오성)가 패싸움 상황에서 유독 한 사람만 괴롭힌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래야 싸움판에서는 맞은 놈이나 구경한 놈이나 모두 다 겁을 먹고 멀리하게 된다는 말이다.

2천 년도 더 전인 중국 전국시대 때 이야기다. 진 나라의 정치가 상앙은 법령의 무게감을 알리기 위해 나무를 옮기는 자에게 100만 근을 준다는 거짓말 같은 포고령을 내렸다. 아무도 믿는 이가 없었다. 나라에 영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거나 말거나 이를 실행에 옮긴 이에게 정말로 100만 근의 상이 내려지자 사람들은 나라의 말과 다른 법령을 믿게 되었다. 직접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치다. 하나라도 제대로 보여주면 다른 것은 보지 않아도 말만으로도 믿는 법이다. 그동안 쏟아낸 말들이 다 현실이 될 거라고 믿는 이는 없다. 하나만 잘 되는 걸 보여주면 말발도 먹히고 약발도 받을 수 있다. 그래야 다른 것도 할 수가 있다.

부패와의 전쟁만 해도 그렇다. 제대로 나쁜 놈을 골라서 단죄하면 박수가 쏟아질 것이다. 대신 변죽만 울리다 정말 나쁜 놈은 봐주고 미운털 박힌 놈만 손 보려 하다가는 아무도 믿지 않게 된다. 연례행사쯤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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