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야" 부용대 시뻘건 불꽃폭포 장관. '물과 불의 만남' 탈놀이와 마을축제로
하회마을에는 서민 놀이인 하회별신굿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양반 선비 등 지식층이 즐기던 기막힌 상류층 놀이도 전승되고 있다. 바로 하회선유줄불놀이다. 뱃놀이에다 불놀이까지 겸한, 그야말로 여름밤을 황홀하게 하는 몽환적 놀이다.
음력 7월 16일 저녁 달이 떠오르면 하회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낙동강에는 연꽃 같은 달걀불이 흐르고 절벽에선 불 폭포가 연출된다. 그리고 하늘에는 안개 같은 불비가 내린다. 가야금이 연주되면서 선유(船遊'뱃놀이)에 나선 선비들의 시심(詩心)을 자극한다. 하회선유줄불놀이는 로마 네로 황제나 진시황도 못해 본 특권적 불놀이다.
◆하회마을만의 독특한 불놀이
"하회탈춤이 세계적이듯 선유줄불놀이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하기 이를 데 없는 하회마을만의 놀이입니다."
권두현(50) 경북미래문화재단 이사는 하회선유줄불놀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삼복지간 한여름 밤 음력 7월 기망(旣望)인 열엿새 날 하회마을에 달이 떠오르면 여남은 명의 양반과 선비들이 나룻배를 타고 마을 건너편 부용대 앞 옥연이라는 강물 위에서 뱃놀이를 시작한다.
배는 네 귀퉁이에 장대를 세운 다음 모기장처럼 차양을 치고 초롱을 달아 불을 밝혀 놓은 가운데 밀짚모자를 쓴 뱃사공이 조용히 삿대질을 한다. 나룻배가 미끄러지듯이 강물 위를 흘러간다. 뱃놀이를 시작한 양반과 선비들은 서로 술잔을 권하며 정담을 나누다가 흥이 생기면 적벽가를 읊조리거나 강물 위에 비친 명월을 즐긴다. 이때 배에 함께 탄 기생들도 장구를 치면서 흥을 돋우는 추임새 역할에 나선다.
저녁노을이 지고 강물 위에 어둠이 깔리면 때맞춰 부용대 절벽에서 강을 가로 질러 만송정 소나무에 매어 둔 줄불 불주머니에서는 불가루가 꽃비처럼 강물 위로 흘러내린다. 다섯 가닥의 새끼줄에는 줄불이 차츰 강을 건너가면서 이윽고 강 전체에 불꽃비가 흘러내린다. 불안개인가. 은하수인가. 밤하늘에서 불비가 흐르는 이 몽환적 분위기는 뱃놀이장을 삽시간에 선계(仙界)로 만든다. 구경꾼들의 숨소리도 잦아든다.
이뿐만이 아니다. 강 상류로부터 달걀불이 떠내려 온다. 어둠이 깔린 강물 위에 떠다니는 달걀불은 기름을 담은 달걀껍데기에 솜 심지를 심어 불을 밝히고 박 바가지에 담아 띄운 것. 수십 개에 이르는 달걀불이 강물 위에 비친 모습은 유수처럼 흐르는 세월을 말해 주는 듯하다. 뱃놀이를 하고 있는 양반 선비들에게는 시심을 솟구치게 한다.
선유줄불놀이의 최대 클라이맥스는 부용대 절벽 꼭대기에서 불덩이가 떨어지는 낙화(落花)다. 바싹 마른 솔가지 나뭇단에 불을 붙이고 절벽 아래로 던져 내리는 것. '낙화야!'하는 소리와 함께 불붙은 나뭇단은 시뻘건 불꽃을 내면서 타오르며 떨어지다가 바위에 부딪힐 때마다 불폭포를 이루며 장관을 연출한다. 구경꾼은 물론이고 시연하는 사람들도 탄성을 지른다. 불붙은 솔가지 나뭇단은 바위에 부딪히면서 사방으로 튕겨 절벽 아래 바위 기슭이 온통 불꽃으로 뒤덮인다.
◆반상(班常) 간 함께 즐긴 축제
"하회탈춤이 상민들의 놀이였다면 선유줄불놀이는 봉건사회의 지배계층인 양반'선비들의 놀이였습니다. 그러나 두 놀이 모두 반상 간의 벽을 허물고 서로 즐기며 함께 공유했다는 것이 매우 의미 있습니다."
권두현 이사는 경남 함안 괴항과 경기 여주 본두리, 경남 마산 진동 그리고 전북 무주 두문에도 낙화놀이가 있으나 하회마을처럼 입체적이고 종합적으로 드라마틱하게 연출되는 낙화놀이는 어디에도 없다고 말한다. 대부분 숯과 소나무껍질 가루 등으로 숯 봉지를 만들어 철삿줄에 매달고 불을 붙여 불가루를 흘리는 정도. 유등과 낙화, 선유를 함께 연출하는 곳은 하회마을 이외에는 없다고 한다.
"하회마을은 조선시대의 양반문화가 호국충절 마을의 표상처럼 피어난 곳이면서도 하회탈놀이와 같은 해학과 풍자의 민중적 문화도 함께 너그럽게 수용되면서 맥이 끊기지 않고 수백 년이나 전승돼 온 곳이지요."
하회별신굿 부네역 손상락(56) 학예사도 하회선유줄불놀이를 분석해 보면 조선 봉건시대 속에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여기처럼 동화된 사례도 없을 뿐더러 반상의 문화가 이렇게 조화를 이룬 곳도 없다고 설명한다.
양반과 선비들이 기생들과 함께 뱃놀이를 하면서 시를 짓는 시회(詩會)의 흥을 극대화하기 위한 선유줄불놀이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부담이었다. 줄불 숯 봉지를 수백 개씩이나 만들어야 하고 새끼를 굵게 엮어 강을 가로 질러 걸쳐 놓는 일부터 달걀불을 만들고 낙화를 투척하는 준비와 연출에 필요한 수고로움은 고스란히 상민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상민들은 부담스러워 하지 않고 여름철 세시풍속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어떻게 그럴까. 하회탈춤을 통해 선유줄불놀이를 한 번쯤 비꼬는 풍자도 있을 만한데 그렇지 않다.
이에 대해 손상락 학예사는 모두 하회마을 태극사상에 근거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반상의 구별은 있었지만 양반과 상민도 사회적 비중이 같은 크기로 태극의 균형을 이뤘다는 것. 그래서 반상이 서로 존재를 받아들이고 반상의 문화인 선유줄불놀이와 서민의 문화인 하회별신굿탈놀이가 공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성(物性)상 상극인 물과 불이 놀이를 통해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도 태극이다. 그게 바로 선유(물)-줄불(불)놀이라는 것이다.
'물과 불의 축제'라는 책을 통해 안동대 한양명(54) 교수는 "현대식 폭죽놀이가 분칠한 여인네의 속 보이는 몸짓이라면, 선유줄불놀이는 꾸미지 않은 조선여인의 그윽하면서도 깊이 있는 춤사위 같은 것"이라고 비유하며 하회선유줄불놀이를 극찬했다.
◆하회마을의 절묘한 '문화 품앗이'
그동안 하회별신굿탈놀이에 비해 하회선유줄불놀이가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못한 이유를 이제야 알 만하다. 대부분의 전승 민속놀이가 억압받는 민중들의 한풀이 굿인 관계로 서민들의 민속만이 우리 전통문화인양치고, 특권층의 교만하거나 군림하려는 듯한 놀이는 관심조차 두려고 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장맛비 막 개어 점점 가을이 다가와/ 좋은 날 술 싣고 뱃머리에 기댄다/ 맑은 마음으로 물결 위에 비친 달을 희롱하고/ 눈앞으로 언덕 위 누대가 비스듬히 보이네/ 은촛대에 붉은 소매 날리고/ 투명한 맑은 퉁소 소리 흐른다/ 소동파 노닐던 곳 천 년간 텅 비어/ 하늘이 우리에게 다시 놀이 잇게 하였네.
아름다운 인연 이어가기 좋은 가을/ 십리의 물안개가 노 끝에 일어나네/ 달빛 아래 배 띄우니 막 계전 오른 듯하고/ 바람 타고 노니 경루에 앉은 듯하네/ 부용대에 떨어지는 불은 별빛처럼 흘러가고/ 갈대숲 강물 높이 기러기 날아가/ 문장에 능한 태수는 유람에 겸해서/ 치장한 배에서 풍악 울리며 노네.
한참이나 부용대를 건너다보던 권두현 이사는 18세기 하회마을 선비였던 류도순(1842~1910)이 선유줄불놀이를 보며 지은 시를 읊어 준다. 선유줄불놀이를 읊은 시로서는 가장 오래됐다고 한다. 시구를 미루어 배경은 밤하늘을 아로새기는 줄불놀이가 벌어진 뱃놀이 시회(詩會)로 보인다. 치장한 배와 퉁소, 낙화 등의 단어는 하회를 찾은 안동부사 일행과 하회 사족들이 벌이는 시회에서 악공들이 퉁소와 북을 연주하는 모습도 그려 놓았다. 하회마을 부용대 앞 뱃놀이는 이 마을 사족(士族)들이 중국 북송의 시인 소동파(蘇東坡)의 적벽 뱃놀이를 본떠 만든 것이라는 점도 엿볼 수 있다.
"선유줄불놀이가 하회마을 양반 선비의 특권적 놀이였으나 그 행사는 마을 구성원들이 모두 참여하는 축제 형식으로 치러졌습니다."
권 이사는 '한국 유일의 전통 불놀이', '양반 놀이문화의 정수'로 불리는 하회선유줄불놀이는 선유와 줄불, 낙화, 달걀불 등 다양한 형태가 한데 어우러진 국내 유일의 불놀이라고 말한다. 선유를 즐기는 양반 선비나 달걀불을 띄우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함께 즐겼다는 것이다. 언제쯤인가 한 좌익계 인사가 하회선유줄불놀이를 관람하고 나서 조선시대 머슴 등 기층민들의 노동착취가 극을 이룬 특권층의 전통문화라고 깎아내리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는 풍류의 일환으로 여유 있는 양반의 여가 문화라는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 억제를 요체로 하고 있는 성리학의 이념을 지키는 양반 선비들의 의식이 하회탈춤처럼 몸을 위주로 신명을 풀어내는 역동적인 놀이를 하기는 그리 쉽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권 이사는 그래서 시회를 겸하고 자연과 벗하는 선유줄불놀이가 민중놀이인 하회별신굿에 상응해 서로 휘돌아 태극을 이룬 것이 탄생의 배경이라고 설명한다. 하회별신굿에 양반들은 경비를 대고, 선유줄불놀이엔 상민들이 노동을 댄다. 말하자면 절묘한 문화 품앗이다. 산태극 물태극의 하회마을은 반상의 놀이 문화도 결국 서로가 균형을 맞춘 태극 형세를 띠고 오랜 세월 전승되면서 유독 독특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신도청권 전략기획팀
권동순 기자 pinoky@msnet.co.kr
심용훈 객원기자 goodi6864@naver.com
사진작가 차종학 cym47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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