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희의 꿈꾸는 인문학] 잠수함 속의 토끼

입력 2015-03-23 05:00:00

오직 견뎌내는 일 견뎌내면서 서서히/밑으로 더 아득한 심해 속으로 숨차 오르는 일/그래 무겁다는 것은 얼마나 숨 가쁜 일인가/가슴 죄는 일인가 허파를 가지고 있다는 이 사실은/그 얼마나 솟구치는 벅찬 설렘인가 이 고요는(김태형의 '노란 잠수함' 중에서)

소설 '25시'의 작가 콘스탄틴 비르질 게오르규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잠수함을 타는 수병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잠수함에 산소측정기가 없어 토끼를 태웠습니다. 토끼는 산소 부족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토끼가 졸면 산소가 부족하다는 뜻이어서 그때마다 잠수함이 수면으로 부상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잠수함 속의 토끼'는 그런 존재입니다. 잠수함의 토끼가 사라지면 잠수함은 모두의 무덤이 될 것입니다. 결국 외부의 어떤 공격에 의한 것이 아닌 내부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는 뜻입니다. 국가를 경영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각인해야 할 진리입니다. 가족과 같은 작은 사회든, 국가와 같은 큰 사회든 반드시 잠수함의 토끼는 필요합니다. 잠수함의 토끼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멀리해서도 안 됩니다.

소위 지식인은 잠수함을 탄 토끼입니다. 사회의 이상(異常)을 남들보다 먼저 알아차리고 알리는 역할을 수행해왔습니다. 지난날, 문인들이 그 중심이었습니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문학이 빛이 났습니다. 1970년대는 소설의 시대였습니다. 산업화, 도시화로 인한 황폐한 시대를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그려냈습니다. 1980년대는 시의 시대였습니다. 시는 짧고 호소력 짙은 표현으로 80년대의 어둠을 노래했습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문학은 존재의 심연이나 사소한 일상의 세계로 침잠했습니다. 이른바 대서사의 시대가 끝이 난 것이지요. 하지만 그 결과로 문인들이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의 영향력은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모두가 행복한 시대는 아닙니다. 1970, 1980년대와는 다른 절망들이 곳곳에 숨을 쉬고 있습니다. 여전히 절망들은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불행이나 절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잠수함 속의 토끼가 사라진 것이지요. 문인이란 김태형의 시처럼 '오직 견뎌내는 일'로 살아가면서도 그 삶을 '솟구치는 벅찬 설렘'으로 만들어가는 사람인 것이지요. 그런 문인이, 그런 지식인이 그립습니다.

현재 우리는 진정한 지식인이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조차도 대부분 자본 지식인을 지향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시대의 멘토라 불리는 사람들은 시대정신을 떠들면서 정작 시대가 지닌 아픈 현실에는 무감각합니다.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면서, 자신을 위로하고 타인을 위무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면 현실의 부조리한 부분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지는 못합니다.

이가 아픈 사람이 없으면 치과병원이 필요 없듯이 아픔이 없으면 멘토도 의미가 없습니다. 어쩌면 멘토는 현실의 아픔을 끊임없이 재생산해야 존재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렇다고 치과의사를 위해 이를 일부러 아프게 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멘토를 위해 우리가 아플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가장 불행한 것은 그러한 상황이 지속돼 잠수함의 토끼 역할을 하는 지식인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지금이 기회일 수 있습니다. 대부분 현재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도 그 해결의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렵게 방법을 찾아도 그 방법이 다시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러다 보니 아침마다 들여다보는 신문에는 상처로 가득합니다. 인터넷 공간에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욕설이 난무합니다. 대립과 갈등이 민주주의의 자연스러운 풍경이긴 하지만 타협과 배려도 필수적인 풍경입니다. 그 모든 역할을 잠수함의 토끼들이 수행하는 그날을 기다립니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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