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조선의 젊은 엘리트들이 탐독한 책 중에는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의 '사선(死線)을 넘어서'(1920)라는 소설이 있다. '사선을 넘어서'는 빈민과 생활하며 빈민구제운동에 헌신했던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의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출판 직후 일본에서 100만 부가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이다.
일본 빈민구제에 힘쓴 일본인 목사의 자전적 소설에 식민지의 젊은 엘리트들은 왜 열광했던 것일까. 가가와 도요히코는 농민과 빈민 등 가난하고 소외받은 자들의 생활을 개선하고 자립을 도왔으며, 청빈과 무소유에 기반한 공동체적 삶을 추구했다. 가가와 도요히코의 사상에서 조선의 젊은 엘리트들은 전근대적 조선의 개혁을 꿈꾸며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일본의 태평양전쟁 참전에 반대하여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고, 종전 후 일본의 조선 침략 행위에 대해서 한국 정부에 사과하는 등 자신의 사상을 행동으로서 실천하였다. 이런 그의 삶을 돌아볼 때, 식민지의 젊은 정신들이 그에게 열광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가가와 도요히코의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대구 출신 기독교 사회운동가들이 앞장섰다. '예수촌' 건설을 주창한 대구 교남학교 출신 유재기와 대구 계성학교 출신 이영식, 최문식 등이 그들이다. '장애인 등 소외된 자들 중심의 공동체적 삶'을 최종적 지향점으로 설정한 현(現) 대구대학교의 설립 역시 '한 사람은 만인을 위해, 만인은 한 사람을 위해'라는 가가와 도요히코의 '만인복지' 정신을 기초로 이루어졌다.
가가와 도요히코의 정신은 기독교 계통의 사회운동가들뿐 아니라 조선의 자립을 통해 일제로부터 해방을 도모하려 했던 많은 작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상록수'(1935)의 심훈이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여자신학교를 졸업하고 농촌계몽운동에 투신, 농민의 자립과 농촌 생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헌신하다가 죽음에 이르는 여주인공 채영신의 희생적 삶은 당시 조선의 젊은 엘리트들을 감동시켰고, 마침내 그들을 농촌계몽운동으로 향하게 했다. 국민 대다수가 농민이었던 조선의 상황에서, 핍진한 농촌의 현실이 바로 조선의 현실이었고, 가난한 농민의 자립이 바로 조선의 자립이었다.
그러나 심훈이 주목한 것은 농민의 자립, 농촌 생활공동체 형성과 같은 현실적 부분만은 아니었다. 공동체의 삶을 위해서 무조건 자신을 헌신하고, 희생하는 사람들만이 지닐 수 있는 '순정(純正)한 정신의 힘', 심훈은 '상록수'의 채영신을 통해 그 힘의 의미를 그려내고 있었다. 청빈과 무소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에 기반한 '순정한 정신의 힘'이야말로 소유를 통해서만 자신의 힘을 과시할 수 있었던 일본 제국의 이기적 욕망에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것이다. 심훈이, 그리고 조선의 젊은 엘리트들이 일본인 가가와 도요히코에게 열광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에게서 일본제국에 맞설 수 있는 그 '순정한 정신의 힘'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정혜영 대구대 기초교육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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