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청 시대 하회마을] ⑧한옥고택

입력 2015-03-17 05:00:00

기와·초가 구분없이 느티나무 중심 북촌·남촌 태극모양 배치

하회마을의 대표적인 고택인 풍산 류씨 문중 대종가인 양진당 사랑채 앞에서 하회별신굿 탈놀이 양반탈과 할미탈, 부네탈과 선비탈, 초랭이탈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보물 제306호인 양진당은 원래 99칸으로 지어졌으나 지금은 54칸만 남아 있다.
하회마을의 대표적인 고택인 풍산 류씨 문중 대종가인 양진당 사랑채 앞에서 하회별신굿 탈놀이 양반탈과 할미탈, 부네탈과 선비탈, 초랭이탈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보물 제306호인 양진당은 원래 99칸으로 지어졌으나 지금은 54칸만 남아 있다.
하회마을 고가옥들은 지배계층인 사대부 기와집이든 피지배계층인 상민들의 초가집이든 한데 반상의 영역 구분없이 서로 어울려 지어져 있는 게 특징이다. 일반적인 전통마을의 경우 반상의 거주지가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지만, 하회마을의 경우는 다르다. (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 제공
하회마을 고가옥들은 지배계층인 사대부 기와집이든 피지배계층인 상민들의 초가집이든 한데 반상의 영역 구분없이 서로 어울려 지어져 있는 게 특징이다. 일반적인 전통마을의 경우 반상의 거주지가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지만, 하회마을의 경우는 다르다. (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 제공
하회마을의 역사를 지켜 온 수령 600년 된 동신목(洞神木) 느티나무 앞에서 하회별신굿탈놀이 보존회원들이 자세를 잡았다. 이 느티나무는 하회마을 고가옥들의 좌향을 잡아주는 기준점으로 배산임수 형태의 풍수지리상 산(山)을 대신하고 있다.
하회마을의 역사를 지켜 온 수령 600년 된 동신목(洞神木) 느티나무 앞에서 하회별신굿탈놀이 보존회원들이 자세를 잡았다. 이 느티나무는 하회마을 고가옥들의 좌향을 잡아주는 기준점으로 배산임수 형태의 풍수지리상 산(山)을 대신하고 있다.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하회마을은 마을 지세가 산태극 수태극을 이룬 태극형이다. 산과 강이 서로 휘돌아 맺혔으니 산과 강을 기준으로 하는 마을 내 고가옥들의 좌향(坐向)도 태극형으로 휘돌아 잡혀 있다.

이 때문에 하회마을 내 고가옥은 초가, 기와를 막론하고 좌향이 같은 집이 한곳도 없다. 마을 한가운데 약간 언덕진 곳에 자리한 600년 된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모든 집들이 강을 향해 빙 둘러앉아 있는 형세다. 마을 지세가 태극형이니 집도 태극형에 맞춘 것.

우리나라 어느 전통마을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배산임수(背山臨水) 좌향이다.

◆하회마을 대표건물 양진당과 충효당

하회마을의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양진당과 충효당, 북촌댁, 남촌댁을 꼽는다. 하회마을 터줏대감 류왕근(60) 마을보존회장은 먼저 보물 306호인 양진당(養眞堂)으로 안내한다. 수령이 600년이나 되는 동신목 느티나무 삼신당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정남향 집이다.

어른 5명의 아름으로도 재지 못하는 거목인 느티나무는 600년 전 풍산 류씨의 마을 입향 시조인 공조전서(工曹典書) 류종혜 공이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00년대에 지은 이 양진당은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의 형인 겸암 류운룡(1539~1601) 선생의 종택으로, 그의 후손인 류영의 호를 당호로 사용해 양진당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류 회장은 원래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대저택 규모인 99칸으로 지어졌으나 현재 54칸만 남아 있다며 아쉬워한다.

"마을의 형세가 솥을 뒤집어 놓은 모양새로 가운데가 약간 불룩합니다. 바로 불룩한 저곳이 돌혈이라고 하는 마을 지세의 중심인데, 동신(洞神)인 삼신당 느티나무가 자리하고 있지요."

겸암 선생의 15대손인 류 회장은 하회마을 내 가장 어른 격인 집이 바로 양진당이라고 자랑한다. 기교를 한껏 부린 이입공(二立工)으로 지은 높다란 솟을대문을 들어서자 중문채와 대문채가 연결된 행랑채부터 눈에 들어온다. 솟을대문에서 정면에 바로 보이는 건물이 사랑채다.

마당에서 쳐다봐야 할 정도로 사랑채가 높고 겨자각으로 툇마루 난간을 둘러놓아 마치 누각 같은 분위기다. 정면 문주 위에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는 현판을 걸어 두고 있다. 안채는 행랑채에 가려져 있다. 과객이 들어서는 것을 안주인이 슬쩍 살펴보는 행랑채 벼락창이 눈길을 끈다.

사랑채 내부에는 한석봉이 썼다는 양진당 당호와 여러 현판들이 걸려 역사를 말해 준다. 사방에 툇마루가 깔려 있는 사랑채에는 안채로 연결되는 작은 문 하나만 있다. 사랑채 뒤로 동신인 삼신당 느티나무가 보이고 그 곁에 불천위 사당이 있다. 하회마을에는 입암 류중영, 겸암 류운룡, 서애 류성룡, 귀촌 류경심 등 모두 네 분의 불천위를 모시고 있다.

양진당을 나서면 바로 길 건너에 서애 류성룡 대감의 유덕을 기리는 충효당(忠孝堂)이 보인다. 보물 414호로 지정돼 있는 이 충효당은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가면서 지구촌 세계인들에게 소개된 건물이다.

좌향은 삼신당 느티나무를 등지고 서향이다. 양진당을 의식해서 서향으로 지었다고 한다. 강을 향해 있는 서쪽 행랑채를 기다랗게 지은 것은 서애 대감의 8대손이 병조판서로 있을 때 군사들이 지낼 수 있도록 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류성룡 대감의 유물이 전시된 영모각(永慕閣)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입니다."

류 회장은 박 전 대통령이 임진왜란 당시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한 서애 대감을 '오래도록 그리워하고 기다린다'는 뜻으로 영모각이라고 짓고 글씨를 썼다고 설명한다.

◆와가, 초가 한데 어우러져 대동화합

류 회장에 이어 하회별신굿 부네역 손상락(56) 학예사가 안내하는 마을은 동서로 가로지르는 골목길을 경계로 북촌과 남촌으로 나뉜다. 양진당과 충효당 이외에도 화경당(북촌댁), 염행당(남촌댁)이 있고 양오당(주일재), 하동고택, 작천고택, 귀촌종택 등 고즈넉한 고택들이 차례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마을 내 사대부의 기와집과 상민들의 초가가 구분되어 있는 일반적인 전통마을과 다릅니다. 초가와 와가가 뒤섞여 있는 특이한 마을 모습은 위아래 구분 없이 귀천을 따지지 않고 사회계층이 한데 어우러져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지요."

손 학예사의 말대로 다시 둘러보니 사대부집 주변에 상민들의 살림집인 초가가 자연스럽게 둘러서 있다. 한데 뒤섞여 평화로운 모습이 마을 전체에 그대로 연출돼 있다. 반상(班常)의 구분이 엄격한 봉건 조선시대에 과연 가능한 일이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마을 서북쪽 낙동강변에는 만송정(晩松亭)이라는 소나무 방풍림이 조성돼 있다. 부용대의 절벽이 마을에 직접 비치는 것을 막고, 겨울철 거센 강바람을 막아주기 위한 인공조림 즉 풍수지리상 조산(造山)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하회마을은 우리나라 양반계층이 주도해 조성한 전통 씨족마을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손 학예사는 풍산 류씨의 동성 씨족마을(부계 혈연집단)인 하회마을은 조선 초기 씨족마을 형성기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600년 역사의 하회마을 가옥은 전통 풍수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며 건축됐고, 마을은 주민들의 생활 영역과 생산 영역, 그리고 의식 영역으로 나뉘어 경관과 기능이 잘 조화돼 있다고 설명한다.

"오랜 세월 동안 자연이 그대로 보존돼 왔습니다. 건축을 해도 자연을 파괴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하회마을은 자연과 사람이 하나 된 마을입니다."

손 학예사는 마을 내 초가, 와가 등 살림집은 물론이고 정사, 정자, 서원 등의 고가옥도 모두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뤄 관광객들의 탄성을 자아낸다고 자랑한다. 그래서 중요민속자료 122호로 지정됐다는 것.

특히 고가옥에는 이 마을 출신 명현거유들이 남긴 고문헌과 문학, 예술 작품들이 보관돼 있고 후손들이 그대로 살고 있어 고가옥 건축물만 지어 놓은 여느 전통마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 그는 혼례와 상례, 제례 등 전통 가정의례와 동제와 성황제, 별신굿 등 마을 전통행사가 오늘날까지 그대로 유지되어 이어오고 있는 곳은 하회마을이 유일하다고 강조한다.

◆활만인 전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마을의 제의(祭儀) 영역도 고루 산재해 있다. 마을 입구 큰 고갯길에 마을의 신을 모시는 성황당이 있고, 화산(花山) 중턱과 기슭에는 서낭당과 국신당이 자리해 하회별신굿 등 다양한 민속신앙을 이어 왔다.

유교적 학문 도량의 공간도 적지 않다. 빈연정사와 원지정사는 화천(花川'낙동강)과 부용대를 바라보고 있고, 강 건너편 겸암정사, 옥연정사와 화천서원은 부용대 자락에 위치해 고색창연함을 뽐내고 있다.

"화산 너머 광활한 풍산들은 마을 사람들의 삶을 여유롭고 윤택하게 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지요. 그러기에 하회마을의 자연은 사색을 즐기던 선비들에 의해 경승지로 묘사될 수 있었다고 봅니다."

하회별신굿 할미탈 역을 맡고 있는 인간문화재 김춘택(67) 씨는 "양진당 현판에 실려 있는 '하회 16경'은 마을 주민들이 대대로 이어 온 '자연사랑' 정신을 그대로 엿보여준다"고 설명한다. 하회 16경은 '부용대 바위에 흐르는 맑은 강물'과 '부용대 앞 갈모바위에 부딪치는 성난 물결', 그리고 '화산에 솟아오르는 달' '수림에 지는 저녁노을'을 먼저 그렸다. 그리고 '구름이 내려 봉우리가 잠긴 마늘봉'과 '눈이 갓 갠 뒤의 만송정 솔 숲 모습' '만송정 앞 모래밭에 내린 기러기' 등 마을 자연을 서정적으로 노래했다.

'남쪽 강 건너 밤나무골 마을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와 '강가 너럭바위 반석에서 낚시질하는 사람' '부용대 위에서 들려 오는 노랫소리' '강마을 사람들의 고기잡이 불빛' '옥연정으로 건너가는 한가한 나룻배 사공'에서는 사람들 자체를 애써 사랑하는 따스한 정을 느끼게 한다. 이외에도 김 씨는 만년의 서애가 읊은 옥연 10경과 병산 10절도 있다고 소개한다.

이처럼 자연과 사람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하회마을에는 아직도 모두 437개 동 126개 고가옥에 240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한때는 350가구나 살기도 했었다. 그만큼 사람 살기 좋은 곳이라는 뜻이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생일잔치를 한 곳도 바로 탤런트 류시원의 고향집 하회마을 담연재이다.

"하회마을 고가옥에 얽힌 '활만인 전설'을 통해서도 오래전부터 빈부귀천과 반상을 떠나 서로 더불어 함께 살아온 마을 사람들의 상생 정신을 쉽게 읽어 낼 수가 있습니다."

손 학예사가 들려주는 활만인(活萬人) 전설은 이렇다. 입향 시조가 처음 새 터전을 일구기 위해 집을 짓는데 기둥이 세 번이나 넘어지는 큰 낭패를 당했다고 한다. 세우면 넘어지고, 세우면 넘어지고. 그러던 중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3년 동안 1만 명의 사람들을 도와주는 '활만인'을 하라는 계시를 내렸다는 것,

이에 류종혜 공은 마을 입구인 큰고갯길에 초막을 짓고 3년 동안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음식과 노잣돈을 나눠 주는 등 활인봉사를 하고서야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큰 집을 짓기 이전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미리 살펴봐야 한다'는 베풂의 전설이다. 법만 앞세우고 돈으로 밀어붙여 새집을 짓는 세태에 기가 막히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유명한 프랑스 인류학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찾아와 하회마을 내에 잘 보존된 고택의 가치와 마을 사람들의 대동정신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손 학예사는 사회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이미 600년 전 풍산 류씨가 하회마을에 터전을 잡을 당시부터 있었다고 말한다.

신도청권 전략기획팀

권동순 기자 pinoky@msnet.co.kr

심용훈 객원기자 goodi6849@naver.com

사진작가 차종학 cym47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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