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의 고기가 목말라 하는 꼴…욕심 줄이고 내려올 준비해야"
실체가 없다고 여겨지던 '화병'을 세계 정신의학용어로 만든 정신의학계의 권위자이며 국민 모두가 아프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이시형(83) 박사. 여든이 넘은 지금도 인터뷰 날짜조차 잡기 어려울 정도로 바쁘게 활동하고 있다. 그는 2007년 75세의 나이에 자연치유센터인 '힐리언스 선마을'을 만들었으며 2009년에는 행복호르몬인 세라토닌을 알리기 위해 '세라토닌 문화원'을 열어 힐링의 씨앗을 퍼뜨리고 있다.
서울 서초동 조용한 단독주택가에 자리한 세로토닌 문화원에서 그를 만났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이렇게 아늑하고 예쁜 정원이 있는 사무실에서 일하면 저절로 힐링이 될 것 같다.
▶서울에 있으면서도 도심 같지 않은 조용함에 이끌려 이 집을 사무실로 택했다. 자연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잠시 동안이라도 '나'라는 존재에 대해 집중하고 명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 힐링 아니겠는가.
-전 국민이 병원에 가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멋진 꿈이다. 힐링을 잘하면 이런 세상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마음을 편하게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더 벌려고 더 많이 가지려고 더 이루려고 아등바등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된다. 대한민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격정의 시대를 살아왔다. 지구 상에 이렇게 빠른 변화가 있던 곳이 있었나. 이제부터라도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우아하게 하산을 준비해야 한다. 항상 성장할 수 없다. 내려올 때를 대비해야 한다. 대한민국 힐링의 기본은 하산이다.
-우아한 하산.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것 아닌가.
▶우리는 너무 거칠고 격하다.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욕심 없이 사는 선비정신을 현대에 되살리면 된다. 이것이 바로 세로토닌 적인 삶이다. 세로토닌은 본능을 관장하는 편도체를 다스리는 신경전달 물질이다. 쉽게 말하면 행복호르몬이다. 선비정신으로 자족하고 만족하고 청빈을 사랑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면 힐링이 되는 삶이 된다. 이젠 성장이 아니라 성숙으로 가야 한다.
-조금 둔하게 살자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모두다 과민증후군에 빠져 있다. 성난 고슴도치처럼 날을 세우며 살고 있다. 둔하게 살아야 한다. 욕심 과잉과 의욕 과잉의 시대는 지나갔다. '조금 더'라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면 소득 4만달러이라도 행복하지 않다. 물속의 고기가 목이 마르다면 모두 웃을 것이다. 딱 우리가 그런 모습이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남을 의식하지 말고 배짱으로 살자고 말하고 싶다. 자꾸 남과 비교하고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등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니 사는 것이 힘들다.
-스트레스를 줄일 좋은 방법이 있는가.
▶슬로(slow) 심플(simple) 스몰(small)이다. 천천히 욕심부리지 않고 필요한 것만 갖고 간단하고 여유 있게 사는 것이다. 세상은 경쟁사회다. 이를 피할 수는 없다. 단 경쟁을 하되 공정한 경쟁을 해야 한다. 오늘날 선비정신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이유다.
-또 다른 방법이 있다면
▶과잉자극과 무한 경쟁 속에서 우리의 몸은 병든다. 자연 속에 가면 그 자체가 치유다. 숲 속에 앉아 있으면 편해지는 그런 원리다. 바람 소리 새소리 물소리에 저절로 마음이 가라앉고 오감이 열리며 세포가 살아난다.
-숲속에 하루 이틀 생활한다고 힐링이 되는가?
▶일본 산림과학청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신선한 세포는 한 달간 유지된다고 한다. 한 달에 한 번쯤 숲 속에서 지내면 건강한 세포로 바뀔 수 있다. 강원도 선마을의 참가자 중 60%는 재방문자 이다. 숲 속에서 휴식을 잘하면 비로소 그동안의 뇌 피로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스스로 깨닫게 된다.
-그러면 박사님은 스트레스가 없는가
▶요즘 트리밍(trimming) '다듬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우리 세대는 오직 생존만을 위해 돌격 앞으로만 외친 외통수였다. 나도 40대 후반에 무릎과 허리 등에 문제가 왔다. 나무 아파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그때 동(動)에서 정(靜)으로 생활을 옮겨왔다. 마음도 다듬고 생활도 다듬고 몸도 다듬었다. 난 지금도 어디 가면 '58년 개띠'라고 사기 치고 다닌다.(웃음)
-마음 못지않게 생활습관도 중요한 것 아닌가
▶식습관 운동습관 리듬습관을 개선해야 한다. 배만 줄여도 당뇨병이나 고혈압약을 안 먹어도 된다. 강원도 선마을은 차에서 내리면 계단으로 걸어다녀야 하는 아주 불편한 구조다. 처음에는 불편해하지만 곧 익숙해진다. 음식도 아주 싱겁다. 처음에는 싱겁다고 하지만 두 번째 식사에는 아무도 불평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모든 식탁에는 30분짜리 모래시계가 있다. 식사를 30분 동안 하자는 것이다. 걷고 싱겁게 먹고 오래 씹으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크게 어렵지 않다. 이틀만 되면 조금씩 바뀐다. 조사해 보니 방문자의 82%가 이를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80년대 이후 5년 주기로 '배짱' '세계화' '여성' 등의 화두를 던져 대한민국 핫이슈로 만들었다. 이번의 화두는 무엇인가.
▶자연이다. 죽음과 가까워지는 나이가 되어서인지 자연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자연만이 우리를 치유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75세에 치유센터인 힐리언스 선마을을 만들었다. 그것도 자연과 관련 있는가
▶이젠 치료가 아닌 예방의 시대다. 생활습관만 바꾸면 암 혈압 당뇨병을 예방할 수 있다. 생활습관과 환경을 개선함으로써 병을 예방할 수 있음을 직접 체험하고 배우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처음에는 의사들도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연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가 있다면?
▶40대 중반 허리디스크와 퇴행성관절염이 겹쳐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때 의사가 제 몸 하나 관리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직업적인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병원에 온 환자들을 보면서 이 사람들도 습관만 제대로 가졌더라면 병원에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자연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해 전 세계 유명한 자연의학센터를 다 돌아다녔다.
-모두 박사님처럼 나이 들어서도 일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대부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인생에 대한 열정의 차이다. 게으르게 산다는 것은 인생에 대한 심각한 결례라고 생각한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 지금도 새벽 4, 5시에 일어나 커피 한 잔 마시고 아침을 간단히 먹은 후 일찍 출근한다. 일을 시작하기 전 연구실에서 3, 4시간 공부하거나 글을 쓴다.
-인생을 거의 완벽하게 살아온 듯해 보이는데도 '이렇게 오래 살 줄 알았다면 인생설계를 분명하게 달리했을 것'이라고 했다.
▶사회정신의학자는 미래를 내다보고 국민을 계몽하고 알려줄 의무가 있다. 나이 80이 넘어도 활동할 줄 알았다면 건강장수학에 대한 준비를 더 잘했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도 완벽한 것 같은데 자신에게 너무 엄격한 것이 아닌가.
▶엄격한 것 맞다.
-이시형 박사 하면 '화병'이 떠오른다. 여전히 한국인은 화병을 앓고 있는가
▶지금도 화병환자는 많다. 옛날에는 며느리의 화병이 많았지만 이제는 시어머니가 화병을 앓고 있다.(웃음) 화병은 갑과 을의 관계가 있는 한 사라지지 않을 듯하다.
-나이 들어 좋은 점이 있다면
▶아름다운 것만 보인다. 사회정신병리학자로서 통찰력이 무뎌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들 만큼 세상이 아름답다. 꼴 보기 싫었던 사람도 아름답다. 나이 듦의 축복이다. 심지어 들에 핀 꽃 한 송이도 바위도 모두 대화 상대다. 문인화에 대한 관심도 여기서 비롯된 듯하다.(그는 지난해 문인화 전시회를 열었다. 24일부터 대구봉산문화회관에서 전시회를 갖는다.)
-박사님은 우아하고 섹시하고 멋있게 늙자고 말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섹시하게 살려면 나이 들어도 설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가꾸어야 한다. 깨끗해야 하고 공부도 계속해서 뇌도 섹시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젊은 사람을 만나도 매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벌써 유언장도 써 놓았다고 들었다.
▶잘 죽는다는 것은 잘산다는 의미다. 유언장에는 장기 기증을 하고 가까운 의과대학에 시체를 기증하도록 해 놓았다. 섭섭하다는 자식들의 말에 따라 산에 조그마한 나무 패를 세우기로 했다. 토끼가 넘어지지 않도록 나지막하게 세워야 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큰일은 못했지만 좋은 일 많이 하고 베풀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인생의 목표가 있다면
▶열심히 사는 것이다. 나는 이 사회에 평생 빚을 지고 살았다. 책을 쓰면 읽어줄 독자가 있고 환자가 있고 강연하면 들어줄 청중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고마운 손들이 여기까지 이끌어주었다. 나는 한국사회에, 나아가 인류에 많은 빚을 진 빚쟁이다. 그래서 열정적으로 살아야 한다.(그는 세로토닌 문화원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고, 주말에는 홍천에 있는 힐리언스 선마을로 간다. 일주일에 한두 번 강연 하고 매년 책을 내고 있다. 이미 80권을 넘었다.)
-대구에 40년 서울에 40년을 살았다. 대구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간략하게 이야기한다면
▶대구는 대도시이면서도 농촌문화의 특징을 많이 가진 도시다. 농촌문화의 인정도 좋지만 남의 일에 관심이 너무 많다. 자연히 남의 말을 많이 하게 된다. 이왕 남의 말을 한다면 좋은 말만 했으면 한다. 가끔 대구를 지나칠 때면 대구 하늘이라도 봐야 지나갈 수 있다. 고향은 그만큼 좋고 그리운 곳이다.
김순재 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사진 이성근 lily-3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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