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조의 여왕, 현모양처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단연 신사임당이다. 율곡 이이를 낳고 훌륭하게 키워서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여성에 대한 차별과 한계를 극복하고 시서화(詩書畵)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조선을 대표하는 여성 예술인이자 수신제가를 몸소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 화폐 중 가장 단위가 큰 5만원권의 주인으로 자리하고 있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보다 몇 배나 높은 몸값을 자랑한다. 삼단 같은 머리를 올리고 다소곳이 5만원권 지폐에 자리한 신사임당 덕분에 화폐 이상의 의미를 찾는 이들도 있다.
5만원권은 사실 출생부터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받았다. 고액화폐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뇌물'비자금 등 음성적 거래의 우려와 낭비'물가 자극 등의 염려로 고액권 발행이 매번 유야무야됐기 때문이다.
탄생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지폐 앞면에 들어갈 초상 인물을 선정하는 작업은 말 그대로 우여곡절이었다. 한국은행은 '화폐도안 자문위원회'까지 구성,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중 신사임당은 세종대왕은 물론 김구, 정약용 등 한국을 빛낸 위인 100명과 자웅을 겨뤄야 했다.
이 같은 악조건을 딛고 2009년, 탄생 5년 만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폐로 우뚝 섰다. 5만원권 화폐발행규모는 발행 초기인 2009년 2억 장에서 지난해 말 기준으로 화폐발행 잔액 49조1천억원에 도달하며 은행권 발행잔액(69조1천억원)의 약 71%를 차지하고 있다.
이 같은 높은 위상에도 불구하고 5만원권 발행이 급증하는 만큼 전체 화폐의 환수율이 잠식되고 있다. 전체 화폐 환수율은 2007년 96.2%에 달했고 5만원권이 나오기 직전 해인 2008년만 해도 95.4%로 거의 대부분 회수됐으나, 5만원권 발행 첫해인 2009년부터 감소세를 타며 2013년 73.0%로 70%대 초반까지 주저앉은 데 이어 지난해에는 64.7%까지 급감했다.
두문불출(杜門不出). 문제는 5만원권이 시중에서 자취를 감추면서 전체 유동성에 이상 징후가 감지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특히 대구경북의 5만원권 환수율이 전국 최저 수준이다. 환수율이 30%대로 전국 평균에 비해 두 배나 낮다. 돈을 벌어도 그 돈이 서울 등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보니 환수율이 낮은 것으로 추정된다.
신사임당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경제계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다. 많은 경제 전문가들은 한국경제가 5만원권에 발목을 잡히며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에 빠지고 있다는 경고를 하기 시작했다. 정책당국이 저성장'저물가 고착화를 방지하기 위해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유동성 공급이 늘어난 만큼 실물 부문으로 화폐가 적절히 유통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국은행도 5만원 신권 발행 이후 고액권의 휴대가 간편해지자 경제주체들이 현금 소지를 늘리면서 화폐 환수율이 크게 하락하고 있다고 걱정하고 있다. 화폐 환수율이 낮아진다는 것은 중앙은행이 시중에 풀어놓은 돈이 다시 중앙은행으로 되돌아오지 않고 경제주체들의 호주머니에 고여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실물경기에서 이 같은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 특히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수요 부진, 유가 하락 등의 영향으로 올해 1월 0.8%를 기록해 담뱃값 인상 효과를 제외할 경우 사실상 0%에 근접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경제주체들의 인플레이션에 대한 기대감 역시 낮아지며 기대인플레이션은 2.6%로 2002년 2월 관련통계를 집계한 이래 13년 만에 사상 최저치다. 금리 인하 등 한국은행이 나서고 있지만 백약이 무효다.
돈은 물과 같아서 돌고 돌아야 한다. 고인 돈은 썩기 마련이다. 돈이 돌지 않으면 내수침체가 장기화하고 고스란히 가계와 기업이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신사임당이 계셔야 할 곳은 어두운 장롱 속이 아니라 세상 밖이다.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원장 탄핵 절차 돌입"…민주 초선들 "사법 쿠데타"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