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청 시대 하회마을] ⑤처참했던 가일마을 권오설의 독립운동

입력 2015-02-24 05:00:00

일제에 조직적 항거한 청년운동…전국 '독립만세운동' 불씨 되살려

가일마을 안동 권씨 복야파의 600년 문중사를 끊기지 않고 이어 와 종자종손이 된 병곡종택의 권종만(76) 종손이 하회별신굿 할미탈 역인 김춘택 씨와 부네탈 손상락 씨에게 일제강점기 당시 항일투쟁에 나선 항일 순국열사 권오설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다.
'권오설 열사가 그토록 외치던 평등평화 통일조국은 아직도 영마루 너머 구름인 채 국토는 분단돼 있고 역사는 뒤틀려 비틀거린다'로 끝맺는 항일 순국열사 권오설 선생의 기적비를 광복 70주년 3'1절을 앞두고 하회별신굿 할미탈과 부네탈이 찾아보고 있다. 열사의 거침없는 항일투쟁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는 300년 된 회화나무와 열사가 치켜든 조선 독립의 횃불인 양 하늘을 향해 가지를 쭉쭉 뻗고 있는 은행나무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가일마을 안동 권씨 복야파의 600년 문중사를 끊기지 않고 이어 와 종자종손이 된 병곡종택의 권종만(76) 종손이 하회별신굿 할미탈 역인 김춘택 씨와 부네탈 손상락 씨에게 일제강점기 당시 항일투쟁에 나선 항일 순국열사 권오설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다.

임진왜란을 슬기롭게 극복한 류성룡의 호국충절과 병자호란을 몸으로 가로막아 선 김상헌의 우국충정은 300여 년 후 구한말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 경술국치(庚戌國恥)에 이르러서는 거침없는 항일 독립운동으로 이어진다. 올해가 광복 70주년이다. 일제강점기하에서 온 마을 주민들이 항일 독립운동에 나선 가일마을을 찾았다. 경상북도 신청사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는 가일마을은 일제의 압제가 극에 달한 1919년 3'1운동 직후 항일 순국지사 권오설(1897~1930)을 중심으로 마을 주민들이 맹렬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고리사채를 이용한 일본인들의 농민 수탈이 극심해지자 권오설은 '풍산 소작쟁의' 등을 전개하며 전국적인 농민조직을 결성, 조직적으로 항거한다.

◆일제강점기하 농민운동의 중심 가일마을

"당시 안동지방에는 조선총독부의 비호 아래 일본인들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일인들은 토지를 담보로 돈을 꿔 주는 고리사채로 농민들로부터 농지를 빼앗는 등 경제적 수탈이 극에 달했습니다. 3'1운동 이후 일인들의 독점자본을 앞세운 경제적 식민지화가 한층 강화된 것이지요."

가일마을을 찾은 권두현(51) 경북미래문화재단 이사는 권오설이 사회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당시 배경을 설명한다. 권 이사는 일본인들의 횡포는 농민들을 소작인으로 전락시켰고 빼앗은 농지에서 매년 수확의 7할을 거둬 가는 수탈을 일삼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반일감정이 팽배해 있어서 가일마을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농민단체 결성과 소작쟁의, 그리고 노동운동 전개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권오설도 당시 사회운동의 흐름을 이렇게 단언했다. "항일운동이 격렬해 가는 것은 결코 일부 운동가들의 활동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요, 대중의 생활고와 온갖 사정이 금일에 이르게 한 것이올시다. 보시오, 저 흐르는 물을! 암초가 있다고 물이 흐르지 않습니까. 장애물이 있으면 파세(波勢)가 더욱 격앙할 것이올시다."

악랄한 조선총독부의 탄압과 감시,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경성 전차직공 파업과 평양 인쇄직공 파업, 경성방직 노동자 파업 등이 전국에 퍼져 나갔다. 모두 권오설의 지도에 의한 항일운동의 일환이었다. 나중에 가일마을이 '모스크바 마을'로 불릴 정도로 일제강점기하 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의 메카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경북고 전신인 대구고보를 다니던 권오설은 1919년 광주에서 3'1운동 시위를 주도한 후 일경의 추적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가일마을 역사가 투쟁으로 바뀝니다."

권두현 이사는 당시 가일마을을 주축으로 한 농민운동과 청년운동이 전국에 들불처럼 일어난 그 중심에 권오설이 있었다고 반복 강조한다. 엄혹한 시절인 당시에 벌써 가곡농민조합, 안동청년회, 일직면 금주(禁酒)회, 풍산청년회를 차례로 결성하고, 풍산학술강습회를 설립해 청소년 계몽운동을 벌였다. 당시 가일마을 청년들이 권오설에게 받은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이 때문에 가일마을 8부자 자손들도 모두 그를 따랐다. 가일마을 600년 종자종손(宗子宗孫)인 병곡 종손 권종만(76) 씨는 "권오설 선생은 어릴 때부터 총명함이 유별나게 돋보여 대구고보를 다닐 적엔 경주 최 부자가 나서 학비를 대 줄 정도였다"고 했다.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대부 권오설

조선총독부의 압제가 갈수록 강화되던 1926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승하한다. 계속되는 수탈에 반일감정이 더욱 고조되면서 순종 승하 추도 물결은 새로운 항일운동으로 전환된다. 권오설은 순종 장례식 날을 기해 1919년 3'1운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하 3대 운동으로 꼽는 6'10 만세운동을 기획한다. 사전 계획이 일경에 발각되면서 권오설은 주모자로 체포되지만 6'10 만세운동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주도로 그대로 거행된다. 인산 당일 장례 행렬이 종로4가를 지나는 찰나 학생들이 길 한가운데로 뛰쳐나가 만세를 부르기 시작한다. 권오설의 안간힘은 마침내 3'1운동의 불씨를 되살려 낸다.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전국에서 터져 나온다.

"당시 천도교 구파의 활동도 대단했지만 권오설의 영향 아래 움직인 '안동 청년그룹'이 주도세력이었지요." 가일마을 입구에 세워진 항일 순국지사 권오설 선생 기적비 앞에서 시름 져 앉아 있던 하회별신굿 할미탈 김춘택(67) 씨는 당시 서울로 유학 간 마을 청년들이 맨 먼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체포된 권오설도 옥 속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잔혹한 일경은 20개월 동안 미결수로 붙잡아 두고 권오설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일제 악법은 그에게 5년 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1930년 출옥을 100일 앞둔 어느 날 갑자기 옥사한다. 동생 권오직의 행적을 알아내기 위한 일경의 잔인한 고문 끝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참혹한 죽임을 당하게 된 것. 고향으로 돌아온 그의 시신은 일경의 감시하에 뚜껑이 용접된 철제 관에 담겨 매장됐다. 일경은 고문으로 참혹하게 훼손된 시신을 숨기느라 관을 열 수 없도록 한 것이다. 병곡 종손 권씨는 매장한 이후에도 일경이 마을을 떠나지 않고 열흘간이나 지키고 있었다고 일러준다.

"잔인무도한 일경은 권오설 독립지사의 영혼도 함께 묻는다면서 봉분도 쓰지 못하게 했지요. 몇 년 전 지사의 묘 이장 때 철제 관이 그대로 발굴돼 일제의 만행에 모두들 치를 떨었습니다."

부네탈 손상락(56) 학예사는 항일운동 대가치곤 너무나 처참한 최후라고 몸서리를 친다. 6'10 만세운동 이후 일제의 가일마을 탄압과 고문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가담자로 체포된 가일마을 출신 권오상과 권오운도 일제의 고문 후유증에다 처참한 옥고를 겪고 출소 후 신음 끝에 모두 20대의 나이로 요절했다. 둘 다 권오설의 집안 동생들이다.

그리고 만세운동에 앞장선 안동 출신 권태성과 이선호, 류면희도 중앙고보 재학생이었으나 일경의 모진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1930년 반일격문을 돌리다 검거된 동생 권오직은 6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마을 청년 권영식, 권준홍, 권준희는 광복회에 자금을 대줬다가, 신간회원이던 권오훈은 '불온축문' 사건으로 혹독한 옥고를 치르는 등 온 마을이 일제의 고문에 신음했다. 온몸으로 일제의 고문을 이겨야 했던 마을 청년들은 처참했다. 그러나 그들의 독립 투지만큼은 꺾지 못했다.

"아, 원통하고 슬프다! 내가 너와 인간 세상에서 부자(父子)라는 이름으로 정해진 것이 겨우 33년인데… 네가 과연 죽었느냐. 죽었다면 병으로 죽었느냐. 충직(忠直) 때문에 죽었느냐. 사람의 삶은 올바름에 있는 것이니, 네가 만약 죽을 자리에서 죽었다면 어찌하겠는가!" 권오설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그의 아버지 권술조의 아들 장례식 제문 내용이다. 아들을 처참하게 잃은 한 맺힌 아버지의 울부짖음이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태극지세 호국 마을의 항일투쟁

"하회마을과 가일마을을 비롯해 풍산들을 중심으로 둘러선 소산마을과 대곡마을 사람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경술국치라는 국가적 위기를 차례로 맞닥뜨려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온몸으로 싸워 왔습니다."

권두현 이사는 광복 70주년인 올해 웅도 경북이 옮겨 가는 신도청권은 국난극복과 우국충정, 항일투쟁으로 이어지는 호국의 중심지라고 강조한다. 지난 역사 속에서도 언제나 명분을 앞세우고 나라를 구하는 데 모두 나서 한목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의 중심에 있었던 하회마을 사람들도 구한말 나라를 잃게 되자 곧바로 항일운동에 나선다. 당시 류도발(1832~1910)은 경술국치의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정순국한다. 1919년 3'1운동 땐 고종 승하 소식에 그의 아들인 류신영까지 순국을 결행한다. 당시 안동에선 모두 8명이 식음을 전폐하고 자정순국의 길을 택했다.

하회마을에선 서애 류성룡의 후손들이 항일운동을 계속 이어간다. 3'1운동 당시 만송정 솔밭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친 류점등(1897~1954)이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이어 상해 임시정부 발행 독립공채를 갖고 귀국하다 붙잡힌 류창우(1884~1921)도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한다. 또한 의열단원인 류병하는 서울 부호 이인희에게 군자금을 요구하다 검거돼 옥고를 치렀다. 인근 소산마을에서도 청음 김상헌의 후손인 백범 김구(1876~1949) 선생과 백야 김좌진(1889~1930) 장군이 우리나라 항일 독립운동의 거인으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경술국치 직후 1911년 일제히 나타난 항일 도만(渡滿) 행렬은 가히 역동적입니다. 곧 항일 무장투쟁으로 이어졌지요."

손상락 학예사는 당시 안동은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고 강조한다. 먼저 1910년 12월 백하 김대락(1845~1915)이 압록강을 건넜다. 67세인 그는 가솔 50명을 이끌고 만주로 건너갔다. 이어 이듬해인 1911년 1월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이, 그리고 '만주의 호랑이'로 불린 일송 김동삼(1878~1932), 동산 류인식(1865~1928)이 차례로 도만, 서간도에서 다시 합류한다. 대곡마을에서도 이순신과 함께 노량해전을 승전으로 이끈 병암 권전의 후손인 추산 권기일(1886~1920)이 1912년 3월 가솔들을 이끌고 도만에 나선다. 1910년 말부터 1912년까지 서간도 지역으로 건너간 안동 사람들은 100여 가구, 1천여 명에 이른다.

신도청전략기획팀 권동순 기자 pinoky@msnet.co.kr 심용훈 객원기자 goodi6849@naver.com 사진작가 차종학 cym47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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