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과 전망] 정치는 배신의 역사다

입력 2015-02-18 05:00:00

얼마 전 지인에게 전해 들은 재미있는 얘기다. 지인이 서울의 유명 종합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있다가 복도에서 서성대는 장세동 전 청와대 경호실장을 우연히 목격했다고 한다. 무엇을 하나 싶어 유심히 살펴봤더니, 장 씨는 시계를 보며 엘리베이터에서 진료실까지의 거리와 소요시간을 꼼꼼히 재고 있더라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불쑥 나타났는데, 장 전 실장이 그 앞에서 길을 인도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 지인은 경호실장을 그만둔 지 30년이나 된 장 씨가 지금도 현역처럼 행동하는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왜 저렇게 살까'하는 생각에 씁쓸함을 느꼈다고 한다.

장 전 실장은 '기인열전'(奇人列傳)의 첫머리를 장식할 만한 특별난 인물이다. 작은 이익이나 푼돈 앞에서 태도를 바꾸거나 배신을 마다하지 않는 이들이 활개치는 세상에 살면서도 영락(零落)한 주군(主君)에게 분에 넘치는 충성을 바치는 모습은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별에서 온 그대'처럼 비현실적이다. 제5공화국을 이끌었던 '정치군인들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요즘 정치판에서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풍경임이 분명하다. 정치판에서 충성과 의리라는 덕목은 김영삼, 김대중 양김(金) 시대에는 어느 정도 살아 있었으나, 그들의 퇴장과 함께 사라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좀 깊이 파보면 YS와 DJ도 한때 정치적 스승이던 야당 거물 유진산을 밟고 넘어섬으로써 양김 시대를 열 수 있었고, 1987년 야권 단일화 협상 때에는 서로 '배신자'로 지칭하기도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자신을 보살펴준 박정희 전 대통령을 격하함으로써 자리를 공고히 했고,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자신에게 자리를 물려준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백담사로 쫓아냈다. YS는 전임 노태우 전 대통령을 감옥에 보냈고 DJ는 대선과정에서 공조한 김종필 씨를 사실상 쫓아냈다. 그렇기에 정치를 배신과 변절로 점철된 역사라고 하지 않는가.

반면 박근혜 대통령은 '배신'이라는 단어 자체를 지극히 혐오한다. 배신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수도 없이 겪은 경험 때문이다. 심복에 의한 아버지의 죽음, 아버지에 대한 매도, 믿었던 사람들이 죽은 아버지에 이어 자신마저 배신하는 것을 생생히 지켜봤으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 '유신(維新)만이 살길'이라며 외치다가 10'26 후 "그때 무슨 힘이 있어 반대할 수 있었겠느냐"고 변명하던 고위 관료, 1980년대 식당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만나자 못 본 척하다 다음 층에서 황급히 내렸다는 전직 장관 등등….

젊은 나이에 배신을 그렇게 많이 겪었으니 속칭 '문고리 3인방' 같은 믿을 만한 부하가 아니고는 가까이 두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지 모른다. 아직도 박 대통령은 배신의 트라우마를 완벽하게 극복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다. 세상에는 배신을 배신이라 여기지 않는 사람으로 넘쳐나는데, 정작 대통령은 충성스럽고 의리있는 사람만 골라 쓰려고 하는 듯하다. 참모나 관료는 '써먹고 버리면 그만'인 것을, 굳이 '충성도'를 기준으로 사람을 쓰려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큰 낭비다. 누군가는 '소녀적 결벽증'이라고 매도하지만, 그것보다는 충성스런 참모를 가까이 두고 그들에 대한 통제력을 리더십이라고 착각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박 대통령의 지지율을 계속 떨어뜨리는 근본적인 이유가 아닐까. 재기(才氣)는 넘치되 얍삽한 인사, 출세나 명예욕구에 불타는 열정적인 인사들까지 두루 포용한다면 현 정부의 인재풀이 얼마나 넓어지겠는가. 모난 돌도 쓰기 나름 아닌가. 김기춘 비서실장과 정무특보단 교체가 설 직후에 있다고 하는데 예전 같은 인사 스타일이 반복되지 않을까 우려스러워하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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