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청 시대 하회마을] ④가노라 삼각산아 소산마을의 우국충정

입력 2015-02-17 05:00:00

'淸 멀리 하라'는 청원루…인질로 끌려갔던 김상헌 호령 들리는 듯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척화파 거두 청음 김상헌이 청나라 인질로 잡혀 있다가 돌아와 은거하던 청원루. 하회별신굿 선비탈이 소산마을 청원루 마당에 세워진 청음 김상헌의 시비를 가리키며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척화파 거두 청음 김상헌이 청나라 인질로 잡혀 있다가 돌아와 은거하던 청원루. 하회별신굿 선비탈이 소산마을 청원루 마당에 세워진 청음 김상헌의 시비를 가리키며 '대쪽 같은' 조선 선비의 표상으로, '목숨을 버릴지언정 외세에 굴하지 않은' 그의 우국충정과 드높은 기개를 자랑하고 있다.
청원루 현판
청원루 현판
조선 오백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본 소산마을 삼구정 앞 아름드리 소나무.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환향녀의 한이 스며 있는 듯하다.
조선 오백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본 소산마을 삼구정 앞 아름드리 소나무.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환향녀의 한이 스며 있는 듯하다.

서애 류성룡의 유물이 전시된 하회마을 내 충효당 영모각에는 연중 관광객들이 찾는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도 류성룡의 충절을 기리는 이 충효당에 오르며 신발을 벗었다.

하회마을은 임진왜란을 슬기롭게 극복한 류성룡의 고향이면서 병자호란의 치욕을 온몸으로 막아선 조선 선비 김상헌의 고향 소산마을의 이웃 마을이기도 하다. 김상헌은 청 태종의 침략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있을 당시 화친을 맺자는 주화파 최명길과 쌍벽을 이룬 척화파의 거두다. 병자호란 당시 죽기를 각오하고 결사 항전을 주장했다. 김상헌의 굴하지 않는, 꼿꼿한 선비사상은 구한말 경술국치 때 목숨을 초개같이 던진 항일투사들의 끝없는 구국행렬로 이어진다. 소산마을에도 오래된 노송과 고색창연한 고택이 즐비하다.

◆국난 극복과 우국충정의 고장

"검무산의 태극바위와 하회마을의 산태극, 그리고 낙동강 본류가 휘돌아가는 물태극 권역은 신도청권역과 일치합니다." 하회탈 부네 역 손상락(56) 학예사는 경상북도 도청 신청사가 들어서는 터는 하회마을을 비롯해 소산마을, 가일'오미마을 등 충절의 전통마을이 늘어서 있으며, 태극바위 우국충정의 기운은 멀리 동남쪽 마애마을을 넘어 대곡마을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소산마을 청원루(淸遠樓) 마당에 조선의 선비 청음(淸陰) 김상헌(1570~1652)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병자호란(1636~1637) 당시 예조판서로서 청 태종에 결사항전을 주장한 척화파의 거두였던 그가 청나라에 끌려가면서 지은 시조이다.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자 김상헌은 벼슬을 버리고 곧장 안동으로 낙향해 소산마을 인근 학가산 기슭에 초막을 짓고 절치부심의 은거에 들어간다. 청의 조선군 파병 요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고 해서 1640년 청의 수도 심양에 끌려가 북관이라는 감옥에 갇힌다.

그곳에서도 김상헌은 청국 관리들의 회유를 거절하고 큰 소리로 오랑캐들의 결례를 꾸짖었다고 한다. '올곧다'는 뜻의 '대쪽'이라는 말도 그로 인해 비롯됐다.

그의 고향이 바로 안동 소산마을이다. "신이 국서를 찢은 죄 죽어 마땅하나, 오늘의 의론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소신을 먼저 죽여서 인심을 하나로 하소서."

병자호란 초기엔 결사항전이 득세했으나 전황이 기울자 주화파가 득세한다. 김상헌은 주화파 최명길이 쓴 항복문서를 찢어버리고 대성통곡한 후 자진을 결심한다.

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청에 끌려가는 걸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며 만류하는 가족들에 의해 뜻을 접고 낙향한다. 그러나 그의 형 김상용은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되자 성문 문루(門樓)에서 화약을 터뜨려 순절했다. 당시 김상헌의 나이 67세였지만 노구에도 불구하고 청에 대한 항전의 뜻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항복 의식으로 호된 치욕을 겪었던 인조는 전란 후 김상헌의 우국충정을 위로한다며 '숭록대부'(崇祿大夫)라는 직질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정중히 사양했다.

"추위와 더위가 없어지지 않는 한 누비옷과 갈포옷을 없앨 수 없으며, 적국이 멸망하지 않는 한 전쟁과 수비하는 것을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은거 중 올린 그의 상소문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이다. 치욕의 대가로 주어진 일시적 평화에 안주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비굴하지 않고 단호한 선비정신을 보여준다.

군왕인 인조에게 '와신상담'(臥薪嘗膽)을 청하며, 변방 요새의 방비를 더욱 굳건히 하기를 청한다. 청나라와의 대결이 끝난 것이 아니라 앞으로가 더 문제라고 지적하는 이 상소문은 조선 후기 사회의 기본 방향이 되고, 국가 대의로 설정된 북벌론의 기초가 된다.

"산업사회가 심화되면서 실리만 따지는 약삭빠른 세상이지요. 과연 실리만이 능사일까요. 그래서 풍전등화의 위기에서도 명분을 더 중시한 조선의 선비 김상헌이 그리운 것입니다."

그가 떠나고 빈집이 된 청원루 앞에서 권두현(51) 경북미래문화재단 이사는 자신의 미력을 탄식하며 남긴 그의 시조를 소리 내어 읊조린다. 그의 대쪽 같은 선비정신인가. 허물어져 가는 누각에 오르니 한줄기의 삭풍이 귓가를 따갑게 스쳐 지나간다.

◆금산(金山)이 소산마을이 된 까닭은

하회마을에서 직선거리로 2㎞에 위치한 소산(素山)마을은 원래 금산(金山)마을이었다. 낙향한 김상헌은 은거할 마을 이름이 지나치게 화려하다 해서 소산으로 고쳐 스스로 격을 낮추었다고 한다. 소산마을은 경상도에서 가장 넓다는 풍산들을 품고 있어 금계포란형이다. 풍수지리상 뛰어난 길지로 친다. 소산마을 한가운데에 청원루가 자리해 있다.

당호에 '청나라를 멀리 하라'는 김상헌의 뜻이 담겨 있다. 얼마나 사무쳤으면 집 이름조차 청원루일까. 빛바랜 기둥과 서까래는 이 마을의 기나긴 역사를 말해준다.

마을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좌측 동산 위에 아름다운 풍광과 잘 어우러진 정자가 방문객들을 반긴다. 장령공 김영수가 영천군수를 마치고 87세 노모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지었다는 삼구정(三龜亭)이다. '거북이가 세 마리'라는 뜻의 삼구정 뜰엔 실제 거북의 모습을 닮은 바윗돌 3개가 있다. 어른 2명의 양팔로도 모자라는 아름드리 노송들 사이에 그림처럼 자리한 삼구정 앞에는 경상도에서 가장 넓다는 풍산들이 펼쳐져 있다. 기품 넘치는 노송은 조선 선비 김상헌을 만난 듯하다. 청에 끌려가서도 심양의 밤하늘을 쩌렁쩌렁 울려대던 그의 호령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 밖에 안동 김씨 대종택인 양소당과 동야고택, 돈소당, 묵재고택, 역동재 그리고 '의식주를 검소하게 하라'는 뜻의 삼소재 등 경북도가 지정해 둔 유서 깊은 고택 문화재만 6곳이나 있을 정도다. 즐비한 고택만 보면 작은 하회마을이다.

조선 후기 60년 동안 외척 세도정치를 이끌었다 해서 장동(안동) 김씨 집안을 조선 말엽 난정의 원인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얘기하면 사정이 다르다. 조선 500년 동안 안동 김씨 문중은 15명의 상신(相臣)과 50명의 판서, 7명의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했다. 문과 급제자가 172명, 무과 급제자도 146명이나 되며, 유고나 문집을 남긴 선비가 175명에 달할 정도로 조선을 지탱해 온 명현거유(名賢巨儒) 집안이다.

◆병자호란의 환향녀, 그리고 위안부

"위정자들의 당리당략이나 난정, 그리고 관리들의 공무 오판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민초들의 혹독한 시련을 낳았습니다." 권 이사는 임진왜란도 그렇지만 병자호란 때도 민초들의 수난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참혹했다고 설명한다.

그랬다. 임진왜란 땐 왜적이 조선 백성들을 금수처럼 대했다. 무고한 백성들을 살해해 전리품이랍시고 백성들의 코와 귀를 베어 갔다. 일본 교토에 있는 이총(耳塚)은 바로 억울하게 죽어간 조선 백성들의 코와 귀를 묻은 무덤으로, 전공을 자랑하는 방법으로는 인류 역사상 보기 드문 야만적인 사례이다. 이총은 그래서 400년이 지난 지금도 풀리지 않는 조선의 한이다.

병자호란 때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조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청나라 노예시장으로 팔려갔다. 가족이 파괴되는 아비규환은 민초들의 삶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대부분 무고한 민간인들인 포로들은 죽을 때까지 청의 노예로 살아야 했지만 일부 사대부집 가족들은 노예시장에서 몸값을 치르고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다시 고향으로 살아서 돌아온 조선 여성을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병자호란의 가장 큰 치욕이지요."

손상락 학예사는 오랑캐의 야만적인 전쟁에서 힘없는 여자들이 수난을 겪었다고 탄식한다. 환향녀, 즉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라는 뜻인데, 절개를 지키지 못한 여자, '화냥녀'라는 치욕스러운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당시 지배계층인 일부 사대부 집안에서는 수절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국만리 사지에서 돌아온 며느리를 집안에서 내쫓는가 하면 절개를 회복시킨다며 강에 '회절목욕'을 시키는 소동도 벌였다. 지체만 자랑하던 당시 위정자들은 나라는 고사하고 여성들조차 지켜주지 못했다. 천신만고 끝에 고향을 찾아온 조선 여성들을 두 번씩이나 울린 것이다.

누구 하나 위로하거나 달래주는 이는 없었다. 마치 일제가 강제로 징발한 위안부들이 모진 목숨을 부지해 해방 직후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억울하게 끌려간 사정을 아무에게도 호소하지 못했던 것과 다름없었다. 할머니가 될 때까지 아무 말도 못하고 살아왔다.

이 같은 조선 여성의 수난은 몽골이 쳐들어온 고려 때도 있었다. 당시 지배층은 고려 처녀들을 마구 징발해 몽골에 공녀(貢女)로 바치기까지 했다.

고려 때부터 조선을 거쳐 지금까지 역사와 함께 쉼 없이 연희굿판을 벌여 온 하회별신굿탈놀이. 양반선비 마당에 등장하는 부네탈의 모습에서 당시 환향녀들의 슬픈 표정이 읽힌다.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부네탈, 대사가 없는 부네탈, 꼭 다문 부네탈의 입에 바로 그녀들의 한이 서려 있다. 청원루에 앉아 오줄없이 웃고만 있는 부네탈이 눈물겹다.

"극난 극복의 슬기와 우국충정의 정신은 이제 우리나라 국토의 중심에 선 새 경북, 웅도 경북의 새 가치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서글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한 서린 청원루 앞에서 소산마을 역사를 들려 주는 손 학예사의 말이 비감하게 들린다.

신도청전략기획팀

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심용훈 객원기자 goodi6849@naver.com

사진작가 차종학 cym47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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