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 평양 남산현교회 역사·교인 활동 이야기 담아

입력 2015-01-24 05:00:00

남산재 사람들(독립운동의 요람)/ 이덕주 지음/ 그물 펴냄

"어떤 사람이든지 평양을 처음 와 본 사람에게 평양의 유명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구동성으로 예배당의 종소리라고 한다. 사면 팔방에서 울려오는 종소리는 서로 교향(交響)이 되어 과연 황혼의 평양성을 흔들어 빼는 감이 없지 않았다. 인근 대동군까지 포함하면 당시 평양에는 50여 개 교회가 있었고 교회 종소리가 명물이 될 정도로 기독교가 성행하면서 평양은 '조선의 예루살렘'으로 불리기도 했다." 1928년 가을 '기독신보' 기자의 눈에 비친 평양 풍경이다.

이 책은 해방 전 평양의 대표적 교회 중 한 곳인 남산현교회의 역사와 이 교회를 통해 활동했던 교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남산현교회는 평양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했으며 지금 이 자리에는 인민문화궁전이 들어서 있다.

선교사도 없는 상황에서 독자적인 힘으로 마련된 남산현교회는 1903년 새 예배당 봉헌식이 열릴 때는 2천여 명이 참석할 정도로 교세를 확장했다. 하지만 남산현교회가 유명해진 것은 1919년 3'1운동이 계기가 됐다. 당시 신흥식 담임목사는 민족대표 33명 중 한 명으로 서울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석했다 옥고를 치렀다. 부담임이었던 박석훈 목사 역시 평양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평양 형무소에 수감된 뒤 순국했다. 또 남산현교회는 이름 없이 '∼댁' '∼엄마'로 불리던 여성들에게 이름을 찾아 준 곳이었다. 여성들은 세례를 받으며 이름을 갖게 됐고 교회가 세운 여학교에서 한글을 배운 이들은 3'1운동 직후 항일비밀결사인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런 활동 등을 통해 남산현교회는 '항일 민족운동'의 성지로 인식됐고 3'1운동 이후 청년들과 학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저자인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교수는 "남산현교회는 평양 지역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 존재한 교회였다. 전제 봉건 질서가 붕괴되고 근대 시민사회가 세워지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과도기에 평양 지역 사회에서 개화와 신문화를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으며 일제강점기와 분단시대 한민족 역사와 고락을 함께한 민족 교회였다"고 평가했다. 416쪽, 2만원. 이경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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