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에 이어, 백화점의 고객으로 보이는 모녀가 주차장 알바생들을 몇 시간 동안 무릎을 꿇렸단다. 흔히 '갑질'이라 불리는 일부 부유층의 몰지각한 행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포스코에너지 상무의 '컵라면' 사건, 프라임 베이커리 사장의 '장지갑' 사건, SK 가문 최모 씨의 '맷값 폭행' 사건 등, 이와 유사한 일은 그전에도 있었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가 21세기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전근대적 의식에 사로잡혀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의 봉건사회에서 머슴이 주인에게 인격적으로 예속되어 있었다. 반면 근대 자본주의사회의 노동자는 사용자와 대등한 인격을 가지고 서로 노동계약을 맺는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는 각종 잔혹사들은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적인 계약관계마저 봉건적인 예속관계로 해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거기에는 유구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가끔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상민' 가문 출신이 있느냐고 묻는다. 물론 제 조상이 상민이라고 대답하는 학생은 하나도 없다. 조선시대에 양반계층이 인구의 4% 남짓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96%가 가짜 족보를 가진 셈이다. 우리 사회에서 신분제 철폐는 이처럼 '전 인민의 양반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사회의 성원들이 시민의식이 아닌 양반의식으로 무장하고 있으니, '제도'로서 신분제는 철폐되어도 '의식'으로서 신분제만은 철폐될 수 없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이것만으로 갑질의 사회학을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사실 자본주의사회에서도 사용자와 노동자가 실제로는 대등하지 않다. 사실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이 '가진 것이라곤 불알 두 쪽밖에 없는 자'라는 뜻이니, 그가 자본을 가진 사용자와 대등한 관계에 놓일 수는 없는 일. 노동자 혼자서는 결코 사용자와 인격적으로 대등할 수 없다. '인격적 평등'은 오직 그가 자신을 계급으로 조직하여 '자본 대 노동'의 관계 속에 들어갈 때만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노조 조직률은 채 10%가 못 된다. 그 결과 개별 노동자들은 사용자의 자의에 그대로 내맡겨질 수밖에 없다. 사실 자신을 계급으로 조직하기 이전에는 서구의 노동자들도 사용자에게 인격적으로 종속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서구의 사장님들도 직원들 데려다가 자기 집 담장 고치는 일까지 시켰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배울 만큼 배운 교수들까지 그 짓을 하는 모양이다. 듣자 하니 대학원생들 데려다가 제 집 심부름을 시킨단다.
'재벌'이라는 독특한 기업문화도 빼놓을 수 없다. 웬만한 규모의 기업은 주식회사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것은 회사가 특정 가문의 사적 소유물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사주 가족은 전체 자본 중 아주 작은 지분만으로도 다양한 편법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한다. 이로써 회사는 특정 가족이 통치하는 '왕국'이 되고, 그 결과 원래 '공적' 공간인 기업이 사주 가문의 '사적' 공간에 속한다는 이상한 인식이 발행한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연봉이 제일 높다는 회사에서 노조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그저 경제적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노동자의 지위는 자유로운 계약의 당사자가 아니라, 사주 가문에 인격적으로 예속된 식솔에 불과하다. 이 나라에서 '기업'의 개념은 공동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공적 조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구약성서에 나오는 사적 '기업', 즉 야훼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가업'에 가깝다.
더 절망적인 것은 이게 높으신 분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갑'의 횡포를 겪은 '을'들도 자신이 '갑'의 위치에 서는 알량한 범위 내에서는 도가 넘치도록 갑질을 하려 한다. 왜? '갑'이 되는 경우가 별로 없기 때문에, 그 얼마 안 되는 기회에 평소에 받아왔던 모든 굴욕을 한꺼번에 보상받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전인민의 양반화'라는 위대한(?) 전통은 오늘날 '전인민의 사주화'로 이어지고 있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
1963년 서울생. 서울대 미학과 학사'석사.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중앙대 겸임교수. 카이스트 겸직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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