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을미년<乙未年> 보물

입력 2015-01-06 07:22:21

남한과 북한이 통일을 약속하고 서울과 신의주 간 경의선 철도 완전 개통을 추진한다. 그런데 일본이 참견하고 나섰다. '경의선 운영권을 일본에 영구 양도한다'는 대한제국 시절의 조약을 들고 나온 것이다. 일본은 경의선을 계속 추진할 경우 한반도로 유입된 모든 자본과 기술을 철수시키겠다고 위협한다. 경의선 개통식은 그렇게 무산된다.

한국 대통령에게 남은 실낱같은 희망은 당시 조약에 찍힌 국새가 가짜라는 것과 고종 황제가 숨겨놓은 진짜 국새를 찾을 수 있다는 한 재야 사학자의 주장이다. 대통령은 기어이 국새 발굴을 지시한다. 대통령과 정치적 신념이 다른 국무총리는 이를 방해하고 진짜 국새를 찾으려는 사람들마저 없애려 한다. 총리의 생각은 혼란스러운 통일보다는 국가의 안정을 위한 원만한 대일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강경한 입장에 동해에는 일본 자위대의 함정이 출현한다. 한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한일관계는 전쟁 국면으로 치닫는다. 그 사이 우여곡절 끝에 진짜 국새가 발견되자 사태는 급반전된다. 자위대는 물러가고 일본 외상이 경의선 조약의 무효는 물론 한반도 침략에 대한 사죄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보물은 국새였다.

10년 전 개봉한 강우석 감독의 '한반도'라는 영화의 내용이다. 새해 벽두부터 이렇게 한일관계를 다룬 영화 얘기를 꺼낸 것은 올해가 을미년(乙未年)이기 때문이다. 120년 전인 1895년 을미년, 조선 궁궐에서 벌어진 일들을 재현한 영화 속의 장면이 너무도 선연하게 남아있다. 일본 공사가 사주한 낭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선혈이 뚝뚝 듣는 칼로 고종 임금을 협박하는 참상이다.

그리고 육십갑자가 두 바퀴나 도는 세월이 지난 오늘날 일본 외상이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호통치는 광경이 벌어진 것이다. 비록 영화 속의 이야기라 하지만, 결코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어느 학자의 문명사관이, '한 민족의 정신적 체질 또한 반복된다'는 어느 역사가의 얘기가 그렇게 잔인할 수가 없다.

패권을 앞세운 가해자는 또 이렇게 당당한데, 힘이 모자라는 피해자는 늘 그렇게 당해야만 하는가. 한반도와 아시아의 역사를 능욕한 패륜적 집단은 다시 욱일승천을 획책하는데, 광복 70년의 동방예의지국은 또다시 외세의 침탈에 속수무책이라면, 이는 어느 고약한 신의 조화이던가. 영화에서처럼 엄습해오는 위기를 돌파할 보물은 없을까.

일본은 재무장을 서두르고 있다. 지난 연말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극우 본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장기 집권을 염두에 둔 그의 목표는 군사대국화와 평화헌법 개정이다. 아베 정권의 건재는 동북아의 격랑을 예고한다. 여기에다 중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미국마저 은근히 일본편을 들고 있다. 일사불란한 권력체제를 구축한 중국의 팽창주의 또한 우리에게는 큰 위협이다.

그나마 120년 전 을미년보다 나은 것은 오늘 우리의 국력이 그토록 허망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북분단이라는 치명적인 악재를 끌어안고 있는 게 또한 현실이다. 그뿐이 아니다. 한국 사회의 심각한 갈등과 고질적인 국론의 분열은 똑같은 과오를 거듭하려는 못된 역사의 관성에 홀린 듯 섬뜩하기까지 하다.

세월호 참사 여파와 십상시 논란으로 지난 한 해도 허송하고 말았다. 역사의 교훈을 망각한 탓이다. 다시 국권을 빼앗기고 강산이 찢어지는 통한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2015년 을미년을 새로운 분수령으로 삼아야 한다. 외부적으로는 동북아의 정세를 유리하게 활용하기 위한 통찰력을 발휘해야 한다. 안으로는 사분오열 갈라진 사회를 아우르며 통일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청양(靑羊)의 해인 올 을미년이 던지는 메시지는 거친 호흡을 가다듬고 조용히 내공을 쌓으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보물은 성숙한 국민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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