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돈의 소리와 울림] 사라진 국민통합의 기회

입력 2015-01-02 08:52:01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012년 대선에서 여러 가지 공약을 내걸고 당선됐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힘주어 강조한 공약이 '국민 대통합'과 '경제민주화'였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100% 대한민국'을 이룩할 것이며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고 약속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은 '신뢰와 원칙'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이라고 평소에 강조해 왔다. 그러니만큼 박 대통령이 내건 공약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에 힘입어 박 대통령은 100만 표 차이로 당선됐다.

그리고 박 대통령 임기 5년 중 2년 세월이 흘러갔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내세웠던 공약은 대부분 파기되었고, '국민 대통합' 공약도 언제 그런 말이 있었는가 싶을 지경이 돼 버렸다. 대통령 임기 5년 중 첫 2년을 그대로 보내면 더 이상 새로운 정책을 추진해 나가기는 어렵기 때문에 '국민 대통합' 등 박 대통령이 내걸었던 약속은 이미 공허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됨에 따라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갈등이 상당한 부분 해소되기도 했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이념 갈등이 오히려 증폭되고 말았다. 2007년 대선에서 실용과 중도를 내걸고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은 촛불 시위 후로는 모든 국정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서 임기 내내 평온한 날이 없었다. 필자는 박 대통령이 집권하면 고질적인 지역갈등과 이념 대립을 많이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이명박 정권 기간 중 박근혜 대통령은 '박 전 대표'라고 불리면서 '여당 내의 야당'으로 많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2008년 총선 결과로 의석이 대폭 줄어들어 무력감에 빠진 야당으로선 세종시, 미디어법 등 쟁점이 있을 때마다 '박 전 대표의 양식'에 호소하곤 했다.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언론도 '박 전 대표'를 적대시하거나 비판하는 기사를 쓰지 않았다. 여권 성향 국민들은 박 대통령이 나라를 평온하게 이끌어 갈 것이며 안정적인 개혁을 통해 국민 통합을 이룰 것으로 기대했다. 대선에서 박 대통령을 찍지 않았던 야권 성향 국민들도 박 대통령이 경제민주화, 국민통합 등 국민과의 약속을 대체로 지킬 것으로 생각했다.

2012년 한 해 동안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와 박근혜 후보 캠프에서 박 대통령을 도왔던 필자 역시 박 대통령이 국민통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것으로 믿었다. 필자는 또한 박 대통령이 부친이 남긴 어두운 그림자를 깨끗하게 해소해서 박정희 대통령의 공적이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했다. 헌정을 중단시킨 10월 유신, 그리고 유신 체제 중 있었던 인권침해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진솔하게 사과하고 그 상처를 치유해야만 박정희 대통령도 정당하게 평가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2년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기간 중 제주 4'3평화공원을 찾아 참배하고 헌화했다. 8월 말에는 봉하마을을 찾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에 참배했다. 과거 한나라당 지도부에서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기에 나는 박 대통령이 국민을 통합시킬 수 있겠다고 믿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인혁당 사건, 정수장학회 문제 등 부친 시대의 과거사에 대해 진솔하지 못했다. 그러더니 대선 캠페인 자체가 북방한계선 공방 등 전형적인 색깔론으로 흘러갔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때 박 대통령에 대해 '확신'을 잃어버렸다.

박 대통령의 임기 첫해는 인사 실패와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으로 허무하게 지나갔고, 임기 2년 차는 세월호 참사와 정윤회 의혹으로 모두 보내 버렸다. 국정이 제대로 굴러가고 있지 않음을 알고 있을 박 대통령은 소통도 하지 않는 등 위축된 형상이다. 이런 식으론 남은 임기 동안 어떠한 일도 하기가 어렵다.

이명박 대통령은 임기를 시작하자마자 총선을 치러야 했다. 2017년 12월에 당선될 차기 대통령은 임기 첫해에 지방선거를 치러야 한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 첫해인 2013년에는 선거가 없었다. 더구나 새누리당은 국회에서 안정적 과반의석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임기 첫해를 헛되이 보냈으니, 국민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던 황금 같은 시간을 그냥 보내 버린 것이다. 참으로 허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중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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