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그냥 흘려듣지 마세요
"(석유)곤로 만들다 골로 갔지…. 실패에서 좌절하지 않고 교훈을 얻으면 반드시 성공의 길은 열립니다."
강명주(71) 지지옥션 회장은 대학 졸업 뒤인 1970년대 초반 석유곤로 제조업에 처음 손을 댔다가 폭삭 망했다. 건물도 없고 장비도 빈약한 상태에서 좋은 제품이 나올 리 만무했다. 당시 석유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면서 석유를 쓰는 고객이 줄고, 불량품이 속속 되돌아오면서 1년여 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실패였다.
울진군 죽변의 어촌 초가집에서 태어난 '촌놈' 강명주의 삶은 서울에서 실패의 연속이었다. 서울 경기고 불합격, 덕수상고 등록 실패, 보인상고 중퇴, 첫 사업 실패…. 하지만 실패에 그냥 머무르지 않았다. 실패에서 얻은 값진 교훈은 이후 '대박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
◆'짜장면'에 놀란 가난한 울진 죽변 촌놈
강 회장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재산이라곤 초가집 한 채가 전부.
그는 "아버지는 7살 때인 6'25 나던 해 돌아가셨다. 어머니 홀로 미역, 꽁치, 오징어 등을 말리고 손질해 받은 품삯으로 생계를 잇는 데 급급했다"고 말했다.
강 회장과 동생은 제대로 못 먹고 자랄 수밖에 없었다.
죽변에서 초'중학교를 나온 그는 초교 졸업 때까지 20리 길인 읍내를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중학교 사생대회 때 처음 읍내를 나가봤는데, 여기서 엄청난(?) 경험을 했다.
"사생대회 나가서 선생님이 짜장면을 사주셨는데, '와! 이런 것을 먹고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고 충격을 받았어요."
초가집에 갇혀 제대로 못 먹고, 못살았던 그는 중학교 졸업 뒤 상경을 결심했다.
◆3곳을 돌아 고교를 졸업한 껌팔이 소년
교사들은 중학교 때까지 줄곧 성적이 우수했던 그에게 등록금을 대주겠다며 서울 경기고에 갈 것을 권유했다.
"경기고 시험을 치러 갔다가 '아, 선생님들이 정보가 제대로 없었구나'란 것을 느꼈어. 시험 치면서 곧바로 '안 되겠다'라고 생각했지."
당시 경기고는 한 학년에 8학급이었는데, 이 중 7학급은 경기중 학생들이, 나머지 1학급(60명)에 전국에서 몰렸다. 시골에서 배운 수업으로는 시험문제조차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는 "시험문제에 '유럽' 이런 말이 나오는데, 도대체 알 도리가 없었어. 수학, 영어는 좀 따라가겠는데, 나머지 과목은 듣도 보도 못한 내용이었지. 시골에 뭐 학원이 있어?"라고 했다.
시험에 떨어져 체면을 구긴 강 회장은 시골로 내려가지 않고 야간 상업고를 들어갈 생각으로 학비 벌이에 나섰다. 다방에서 껌을 팔고, 새벽에 신문배달을 했다. 드디어 덕수상고 합격. 하지만 등록금이 문제였다. 열심히 껌을 판다고 당장 돈이 모이지 않았다. 결국 입학을 포기하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얼마 뒤 시험 없이 보인상고에 들어갔지만, 1년여 뒤 또 등록금을 못 내 중퇴해야만 했다. 결국 졸업장이라도 딸 요량으로 영락교회가 운영하는 영락상고 2학년에 편입했다. 어려운 학생들이 큰돈 없이 다닐 수 있는 학교였다. 이렇게 고교를 졸업하는 데 5년이 걸렸다.
◆목장주의 꿈에서 사업가로 바꾼 대학 신문사
강 회장의 인생의 첫 전환점은 영락상고 3학년 초입 IQ테스트 때였다.
"중'고교 통틀어 최고 점수가 나왔어. 경기고 평균이 125로 나왔는데, 내가 140이 나온 거야. 교장 선생님이 담임 보고 '사연을 한번 알아보라'고 했지. 반장도 아니고, 60명 중 59등 하는 애가 최고로 나왔으니 이상했던 거지."
중학교 때까지 대다수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던 강 회장은 졸업장만을 위해 들어온 상고에서 공부를 할 리 없었다. 아는 문제조차 자존심 때문에 풀지 않고 백지 시험지를 내곤 했다.
사연을 들은 담임은 이때부터 자신의 전공인 영어를 포함해 강 회장을 직접 지도하기 시작했다. 강 회장은 그동안 못했던 공부를 1년 동안 몰아쳤다. 고향에서 목장을 경영하겠다는 꿈을 키웠던 그는 고려대 축산과에 합격했다.
고려대 학보사에 들어가서는 정작 전공은 뒷전이었다. 어릴 때부터 소질이 있던 그림 솜씨가 눈에 띄어 학보사 시사만화를 그리게 된 것이다. 학보사 기자와 시사만화 그리기는 대학생활의 전부가 돼 버렸다. 정권 비판적인 만평이 자주 나가면서 정보기관에 끌려가 3일 동안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렇게 1주일에 1차례씩 그렸던 만평이 200회로, 고려대 학보사 사상 유일무이한 기록이 됐다.
◆사업을 통해 배운 철학, '최고의 품질'
대학원까지 졸업한 뒤 처음 뛰어든 석유곤로 제조업이 1년여 만에 제품 불량으로 망하면서 3, 4개월 동안 고민에 빠졌다. 결국 '배운 게 도둑질'이라 신문사를 차려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당시 세계일보 나오고, 문화일보도 창간됐지. 그렇게 큰 신문사도 경영이 쉽지 않았는데, 내가 신문 만든다고 잘 되겠어? 광고가 제일 문제였어. 그래서 생각해 낸 게 '광고 없는 신문'"이라고 회고했다.
경매는 누구든지 물건 공고를 보고 응찰하는데, 법원에서 잘 보여주지 않는데다 전국을 일일이 다니면서 물건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고안해낸 것이 전국의 경매물건을 수집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거였다.
"을지로에 책상 1대만 놓고 사무실을 빌렸어. 타자기로 쳐 등사기로 밀어 만들었는데, 조잡한 '찌라시' 수준의 정보지였어. 그런데 이게 반응이 엄청났지."
처음엔 1장당 1천원을 받았는데, 사람들이 줄을 서서 받아가는 통에 금방 2천원으로 올렸다고 했다. 순식간에 돈이 수북이 쌓이기 시작했다. 경매는 입찰을 통한 계약이기에 '계약경제일보'라는 이름을 붙여 1983년 정식 일간지로 등록했다. 계약(G)+경제(G)에서 이름을 딴 지지(GG)옥션은 이렇게 탄생했다.
강 회장은 지지옥션의 성공 비결을 ▷최고의 품질 ▷무광고 ▷구독료 선불 등 3가지로 꼽았다.
최고의 품질은 곤로사업 실패에서 얻은 교훈이다. 전국의 경매공고를 일일이 찾아다녔고, 단순히 경매정보뿐 아니라 해당 부동산의 등기부등본과 사진까지 첨부하는 등 최상의 정보를 담았다.
광고 없이 구독료만으로 운영하는 것도 경기와 상관없이 안정되게 회사를 운영할 수 있는 비결이다. 특히 구독료 선불은 획기적 발상이었다.
그는 "처음 정보지를 돌렸을 때는 전체의 30% 정도만 수금이 됐어. 정보에 대한 수요는 충분했지만, 보고 난 뒤 돈 내기는 아까웠던 거지"라며 "그렇게 6개월 동안 끌고 가다 '선불제'라는 강수를 썼는데, 이것도 수요가 있으니 잘 먹혀들었다"고 했다.
강 회장의 대박 성공은 실패의 교훈에서 나왔다.
김병구 기자 k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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