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들과 이런저런 얘기, 목욕탕에서 바라본 세상

입력 2014-12-27 07:05:43

대구 동구 신암동의 한 목욕탕에서 목욕관리사가 손님의 등을 밀어주고 있다.
대구 동구 신암동의 한 목욕탕에서 목욕관리사가 손님의 등을 밀어주고 있다.
대구 중구 향촌동의
대구 중구 향촌동의 '대보 사우나' 남자 탈의실 안 이발소에서 이발사 전광호(65) 씨가 손님의 머리를 다듬고 있다.

목욕탕이 일터인 사람들이 있다. 한때 '때밀이'라 불리던 목욕관리사는 대중목욕탕이 생기고 나서 가장 오래된 직업이고, 카운터에서 열쇠 주는 사람은 목욕탕 내 궂은 일을 도맡아 하기에 늘 피곤하다. 규모가 큰 목욕탕에는 남탕 안에 이발소도 있어 꾀죄죄한 몰골로 들어온 사람을 깔끔한 멋쟁이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연말연시 사람들은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오랜만에 때 빼고 광 내러 목욕탕을 찾을 것이고 이들은 더 바빠질 것이다. 그래서 목욕탕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더 바빠지기 전에 목욕탕에서 일하기 어떤지, 그리고 올해는 어떻게 보냈는지 한 번 이야기를 들어봤다.

◆'시원하다'는 말에 힘 얻어

대구 동구의 한 대중목욕탕에서 일하는 박애숙(가명'53) 씨는 목욕관리사 경력만 12년이다. 한때 '목욕탕 주인보다 돈을 더 버는 사람이 목욕관리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수입이 좋을 때도 있었지만 이제 그 정도는 아니란다. 박 씨는 12년 동안 일하면서 이런저런 웃지 못할 일들도 많이 겪었다.

"어떤 손님은 때를 다 밀고 나서 요금을 안 주고 도망을 갔어요. 그런데 이분이 동네 목욕관리사들에게 유명한 상습범이더라고요. 그래서 동네 목욕관리사들이 합심해서 도망 다니는 그 손님 잡는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고생했지요. 또 어떤 손님은 몸 씻는다는 이유로 샤워기를 안 쓰는 데도 네 시간 동안 틀어놓는 손님도 있었어요. 보다 못한 제가 '물 안 쓰실 때는 수도꼭지를 잠가 주세요.'라고 했지만 오히려 화를 내시더라고요. 목욕탕에 있다 보니 정말 별별 사람 다 만나더라고요."

박 씨에게 가장 얄미운 손님은 때를 밀고 나서 한쪽 구석에서 다시 때를 미는 사람들이다. "그런 손님을 보면 '목욕관리사를 못 믿으시나' 하는 생각에 섭섭한 마음이 들 때도 있어요. 기분 좋을 때요? 팔에 깁스를 했거나 몸이 불편하신 분이 제게 몸을 맡기고 때를 민 후에 '시원하게 잘 밀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소리를 들을 때죠. 그때는 '내가 이곳에 정말 필요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주말 지나면 녹초가 돼

대구 동구의 한 대중목욕탕 남탕에서 일하는 최명식(가명'51) 씨는 손님이 1명뿐인 남탕의 카운터를 혼자 지키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최 씨 혼자뿐이었다. "일하는 다른 사람은 없느냐"고 물어봤더니 혼자뿐이란다.

"제가 카운터도 보고, 때도 밀어 드리고, 구두도 닦고, 목욕탕 청소도 해요. 워낙 남탕은 사람이 자주 바뀌니까요. 왜 자주 바뀌느냐고요? 요새 평일에 남탕은 텅텅 비다시피 하니까요. 그래서 때 밀어달라는 손님도 잘 없죠. 수입은 안 생기니 다들 빨리 그만두고 그래요. 저도 온 지 1주일 정도밖에 안 됐어요."

최 씨가 때를 밀고 받는 요금은 1만2천원이다. 등만 밀면 6천원만 받는다. 주말이 되면 최 씨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지만 때를 밀겠다고 오는 사람은 기껏해야 서너 명 수준이다.

"매일 홀딱 벗다시피한 몸으로 사람 몸을 닦아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탕 청소부터 이런저런 뒤치다꺼리 하다 보면 녹초가 돼 버려요. 정말 월요일에는 말할 힘조차 없다니까요."

◆'용 문신'도 자주 보니 친근해져

규모가 큰 대중목욕탕의 남탕 안에는 대부분 탈의실 안에 이발소가 자리 잡고 있다. 머리를 깎고 난 뒤 바로 목욕탕에 들어가 머리를 감을 수 있고, 나오면 드라이기나 헤어크림 등으로 스타일링까지 해 주니 목욕탕 안에서 깔끔한 신사가 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전광호(65) 씨는 1991년부터 대구 중구 향촌동의 '대보사우나' 안 남자탈의실에서 이발소를 운영해 왔다.

"남탕 안에 이발소가 들어온 게 1990년 전후일 겁니다. 80년대 말에만 해도 이발소는 목욕탕 지하나 다른 층에 있었지요. 그런데 당시 서울에는 이발소가 남탕 안에 '커트실'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와 있더라는 거죠. 그 이야기를 듣고 저도 목욕탕 주인을 설득해서 이발소를 남자탈의실 안에 차렸죠. 아마 제가 대구에서 처음으로 남자탈의실 안에 이발소를 차렸을 겁니다."

'향촌동'의 '남탕'이다 보니 한때는 등에 용 문신을 그린 사람들도 꽤 많이 찾아왔다. 전 씨는 이들의 머리도 깎아줬는데, 처음에는 이들을 상대하는 게 겁나기도 했단다. 전 씨는 "더러는 이발비를 떼먹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안면을 트고 친해지니 일반적인 손님처럼 편하게 대하게 되더라"며 "이때 단골이 된 사람들은 지금도 달서구나 수성구 등에 살면서 찾아와 머리를 맡기기도 한다"고 말했다.

◆목욕탕에서 바라본 세상

우리가 목욕탕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잘 기억하는 이유는 서로 세상 이야기를 많이 나누기 때문일 수도 있다. 목욕관리사 박 씨나 이발사 전 씨도 손님들을 상대하면서 묵묵히 때만 밀거나 머리만 깎지는 않는다. 손님들은 이들에게 푸념을 늘어놓을 때도 있고, 세상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이들이 바라본 2014년은 어땠을까. 이발사 전 씨는 손님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요즘 경제가 확실히 어려워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50대 이상인 분들이 손님으로 오시니 정치나 경제, 사회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됩니다. 여러 직업을 가진 손님들을 만나다 보면 적어도 '요즘은 뭐가 잘 된다더라'는 이야기가 은연중에 나오기도 하는데 올해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한 것 같아요. 나라 전체가 어려운 상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목욕관리사 박 씨는 "돈 세상"이라고 말했다. 너무 축약적인 것 같아 설명을 부탁했다. "사람들이 점점 '돈이면 다 해결되는 세상'이라고 믿는 것 같아요. 네 시간 동안 물 틀어놓던 손님도 '돈 더 주면 되지 않느냐'고 되받아친 분이었으니까요. 점점 인간미가 사라진다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요? 또 조금만 빈정 상해도 '네 까짓게…'라며 싸우고 따지는 분들이 많아졌어요. 목욕탕 밖에서 만나면 똑같은 사람인데 말이죠."

목욕탕에 일하는 사람들에 비친 지금의 우리 사회는 뜨겁기는 하지만 공기는 말라 있는, 그래서 후끈하게 땀은 나지만 결국에는 답답해서 뛰쳐나오고 싶어지는 건식 사우나의 모습이었다. 이들은 "2015년은 폭포탕처럼 모든 일이 시원하게 잘 풀리고 온탕처럼 사람들 사이에 따뜻한 인정이 넘치고 이슬사우나처럼 촉촉한 사회가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버리지 않았다.

글 사진 이화섭 기자 lhssk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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