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을 추억한다] 때 미는 목욕 문화

입력 2014-12-27 07:08:41

2013년 10월 3일 미국 CNN 홈페이지에
2013년 10월 3일 미국 CNN 홈페이지에 '한국 때밀이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기사. (CNN 홈페이지 캡처)
"없어서 못 팔아요!" 이달 23일 대구 달서구의 정준산업 공장에서 배정준(38) 대표가 때밀이장갑을 손에 끼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의정 기자 ejkim90@msnet.co.kr

한때 포털 사이트 연관 검색어로 할리우드 스타 기네스 펠트로와 때밀이가 뜬 적이 있었다. 올해 여름 한국을 찾은 기네스 펠트로가 우리나라 한 연예 프로그램에서 한국식 때밀이를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식 목욕탕과 때밀이를 좋아한다"고 했고 제작진이 선물한 때밀이 타월을 받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에 앞서 세계적인 모델 미란다 커도 한 방송 인터뷰에서 "때를 밀면 건강해지는 느낌"이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각질을 강제로 벗겨 내는 때밀이 문화를 보고 누가 무식하고 야만적인 행위라고 했는가. 한국의 때밀이 문화가 전 세계로 뻗어가고 있다. 집에서 간편하게 때를 밀기 원하는 사람들 덕분에 최근에는 때밀이 관련 아이디어 상품도 인기를 끌고 있다.

◆ 한국 때밀이, 외국인에게 물었더니

지난해 10월 미국의 뉴스전문방송인 CCN 홈페이지에 '한국 때밀이의 비밀'(Secrets of a Korean scrub mistress)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등장했다. CNN 기자는 검은색 속옷 차림의 여성 목욕관리사(때밀이)에게 40분간 자신의 몸을 맡기는 때밀이 체험 기사를 썼다. "세신(洗身)이라고 불리는 한국 때밀이는 먼저 열탕에 몸을 충분히 담그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다음 알록달록 화려한 색상의 얇은 사포 종이 같은 한국 '이태리타월'로 몸을 문지른다. 그러면 끈적끈적하고 더러운 죽은 피부가 자연스럽게 쌓인다." 기자는 친절하게 때 미는 과정을 설명하며 '때 잘 나오게 하는 법'까지 소개했다.

외국인에게 한국의 때밀이는 낯설지만 흥미로운 문화다. "이거 뭐에요? 설거지할 때 쓰는 타월 아니에요?" 한국에서 2년째 살고 있는 유학생 알레한드로 스체르바코브(30'에콰도르) 씨가 때밀이 타월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기자가 "이건 한국인이 묵은 각질(때)을 제거할 때 쓰는 타월"이라고 설명하자 "당신 몸을 설거지한다고요?"라며 깔깔 웃었다. 남미 사람들에게 한국의 때밀이 문화는 익숙하지가 않다. 에콰도르에는 낯선 사람들이 알몸으로 함께 목욕하는 한국식 대중목욕탕이 없다. 그는 "스파나 수영장은 있어도 한국 같은 목욕탕은 없다. 공용 샤워실을 찾기도 어렵다"며 "한국의 때밀이 문화는 이상한 것이라기보다 내가 시도해보지 않은 새로운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대구에 사는 텐진 카트상(26'미국) 씨는 찜질방에 갈 때마다 목욕탕을 찾는다. 그가 목욕탕에서 놀란 풍경은 서로 등을 밀며 친분을 다지는 한국 남자들의 모습이었다. 대중목욕탕에 다른 사람의 때를 미는 목욕관리사라는 직업이 따로 있는 것도 문화충격이다. 텐진 씨는 "서양에서도 스크럽 제품으로 피부 각질을 벗겨 내긴 한다. 하지만 남자 여럿이 단체로 목욕탕에 몰려가서 남의 때를 밀어주는 것은 여전히 낯설다"며 "내 몸에 있는 때를 밀어볼 생각은 있지만 다른 사람 등에 있는 때를 미는 것은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고 말끝을 흐렸다.

한국 문화에 익숙한 외국인에게도 때밀이는 쉽사리 할 수 없는 도전이다. 한국에서 8년 넘게 산 줄리안 오트(35'미국) 씨는 한국인처럼 때를 밀어보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열탕에 들어가 피부를 부드럽게 만들고, 그다음 때밀이 타월로 밀었는데도 피부가 붉게 달아오를 뿐 때가 나오지 않았다. 줄리안 씨는 "내 피부는 한국인과 다른 것 같다. 서양인의 피부에 한국인 같은 때가 있는지 의심스럽다"며 아쉬워했다.

◆ 대중탕 문화 쇠퇴하니, 혼자 등 미는 타월이 잘 팔려

때를 미는 데도 기술이 필요하다. 무조건 힘을 많이 준다고 해서 때가 잘 나오는 것은 아니다. 대구 달서구의 벤처기업인 정준산업은 때밀이 업계에 작은 혁명을 일으킨 곳이다. 비누를 묻혀 몸에 살살 문지르기만 하면 때가 나오는 '요술때밀이장갑'을 발명했고, 지금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소비자들은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에 비유해 "때밀이계의 명품"이라면서 '때르메스'라는 별명까지 지어줬다. 이달 23일 찾은 공장도 장갑을 만드느라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매달 공장 기계를 최대로 돌려 23만 개 장갑을 생산해 주문 수량을 맞추고 있다.

때밀이장갑이 기술 특허를 받은 것은 2000년 무렵. 최근 여성 회원이 많은 인터넷 카페, TV 뷰티 프로그램 등 사람들 입에서 이름이 오르내리며 소문이 났고, 뒤늦게 대박이 난 경우다. 올가을에는 생산량이 주문량을 따라가지 못해 한 달씩 기다렸다가 제품을 받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지금은 때밀이 외에 다양한 용도로 장갑이 사용된다. 손에서 잘 미끄러지는 생선을 잡을 때 유용해 낚시터와 횟집에서도 인기다. 고기가 손에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꼼짝마 장갑'이라는 별칭이 설명서에 적혀 있다.

대구의 벤처기업이 왜 하필 때밀이장갑을 개발했을까. 정준산업 배정준(38) 대표는 "이태리타월에는 노랑, 초록, 파랑, 빨강이 있는데 색깔별로 거친 강도가 다르다. 여기에서 착안해 피부에 자극이 적고, 쉽게 때를 밀 수 있는 때밀이타월을 만들려고 한 것"이라며 "요술때밀이장갑은 혼자서 샤워하며 때를 밀 수 있기 때문에 동아시아 목욕 문화, 서양식 샤워 문화의 교집합이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현재 정준산업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건 타월이다. 대중목욕탕에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공동체 목욕 문화가 점차 사라지고 혼자 목욕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현재 상황을 반영한다. 배 대표는 "손가락 장갑이 한 개 팔릴 때 등 타월은 두 개 나간다. 요즘은 목욕탕 가서 모르는 사람에게 '등 좀 밀어주세요'라고 부탁하기 어렵다. 대중목욕탕에 가는 사람들이 줄고, 혼자 집에서 때미는 사람들이 증가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대구에서 출발한 때밀이타월은 전 세계로 뻗어가고 있다. 해외 보따리상들이 제품에 관심을 보여 미국과 일본, 대만, 호주 등 다양한 나라에서 판매되고 있다. 배 대표는 최근 할리우드 스타 기네스 펠트로에게 때밀이 타월을 보냈다. 그는 "기네스 펠트로가 한국의 때밀이 문화를 아주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에 있는 기획사에 영어로 편지를 써서 때밀이 제품을 함께 보냈다. 기네스 펠트로가 요술때밀이장갑을 받았는지 모르겠다"며 "대중목욕탕 문화는 쇠퇴하더라도 한국의 때 문화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황수영 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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