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들 돌아가며 성탄행사…어두운 산길 걸어 마을사람들 모여들어
이웃 마을 크리스마스 행사에 가려고 고개를 오르는데 달빛이 참 환하다. 살이 찰 때까지 차오른 모양이 도톰한 볼의 우리 누이 같다. 내일쯤이면 보름달이 되겠다. 고국의 하늘에도 저 달이 만리장천(萬里長天)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청아한 산속에는 별들도 많다. 두 눈을 말똥거리며 쏟아질 듯한 별들이 눈물을 함빡 머금은 듯하다. 후아이 펑 마이 마을을 지나는데, 정자에 예닐곱 명의 청년들이 앉아 이웃 마을을 가기 위해 마실 채비를 하고 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교회 앞에는 미니 트럭과 오토바이들이 서 있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다. 입구에서 만난 카우로우라라는 청년은 인근 매쳄 마을에서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하며, 오늘 행사를 같이 치르기 위해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몇 개의 산을 넘어왔다. 내일은 옆 마을 성탄절 행사에도 간다고 하는데, 털모자를 쓴 마른 체형의 그의 눈빛은 33세의 나이답지 않게 산 빛을 닮았다. 오지 산마을의 대부분 교회들은 돌아가면서 크리스마스 행사를 한다.
구멍가게에서는 모처럼의 활기로움에 치킨을 튀기고 국수를 연신 말아낸다. 교회를 올라가는 계단 앞에는 젊은 깔리양 아줌마가 파라솔을 치고 어묵 꼬치 종류를 팔고 있다. 가설 천막 무대에서는 아이들의 악기 연습하는 소리가 조용하던 오지 산마을의 적막을 깬다. 사람들도 흥성거리고 아이들은 더욱 신이 났다. 여기저기 모닥불이 타고 있는 공터에는 많은 사람들이 전통 복장을 하고 무리를 지어 서 있고, 아낙들은 수건을 모자처럼 돌려 머리에 쓰고 있다. 어두운 산길을 헤치고 각 마을 사람들이 속속 도착한다. 서양인들도 간혹 눈에 띈다. 밤이 이슥해질수록 모닥불의 심지는 높아가고 사람들은 더욱 불가로 다가선다. 커다란 솥에서는 돼지고기 국이 끓고 태극기가 두 개나 붙어 있는 예비군복을 입은 사내가 따뜻한 국과 함께 등에 멘 망태에서 바나나 잎에 싼 밥을 준다. 나에게 튀긴 종류의 커다란 과자 봉지를 주어 한참 동안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기독교회에서는 무대에서 악기를 울리며 매우 역동적으로 진행되고, 천주교회는 여러 마을의 사람들이 모여서 하기도 하는데 조용하게 치른다. 기둥에는 소나무와 꽃들을 묶고 무대에는 금색 은색 비닐과 오색전구들로 치장했다. 사철 더운 날씨 속에 사는 이들에게는 우리의 가을 정도 날씨가 몹시 추운지 담요와 커다란 타월로 온몸을 감싸고 나왔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오지 사람들에게는 인근 마을 행사라도 좋은 볼거리인지 많이들 찾아왔다.
◆고국의 달
"어데 선가 나를 부르는 님의 음성 들릴 듯한데, 웬일일까 보이지 않는 그대 모습 사랑합니다." 무대에서 '나자리노'의 가사가 흘러나온다. 모계 사회의 전통인지, 깔리양 아낙들은 외부 남자와도 스스럼없이 악수를 청한다. 사람들이 '할렐루야'' 노래를 부르는데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고국을 떠난 지 3년여가 되어가니 오랜 이국생활에 외롭기라도 했을까. "모닥불의 연기처럼 가늠할 수 없는 세상이니, 더욱 겸손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무대에 잔잔한 전통 음악이 나오고 얼굴에 타네카(미용을 위해 나무를 갈아 얼굴에 하얗게 바르는 것)를 바른 여인네들이 올라온다. 전부 바구니를 들고 나와 만물의 근본인 씨 뿌리는 흉내의 춤을 춘다. 앞에서 조무래기들과 놀고 있는 나에게 사회를 보던 목사님이 문득 노래를 시킨다. 반주도 없는데, 자기가 기타로 맞춘다고 어서 나오라고 한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한 번 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이들에게 그나마 우리의 정감을 줄 수 있는 노래가 무엇일까 생각하다 "이국 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고, 어버이 한숨 소리는 초승달일세"로 나가는, 조용필의 '간양록'을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안녕하세요"하며 더듬거리는 인사말로 소녀가 다가와 깜짝 놀랐다. 멀루 키티와라룻(Mulu kittiwararot)이라는 열아홉 살의 눈빛 맑은 소녀다. 어떻게 이 오지 산속에서 한국말을 할까, 의아해하는 나에게, 인근 매쳄 마을에서 10년째 목회를 하고 있는 한국인 목사에게 배웠다고 한다. 이어 무대로 가더니 청년과 커플을 이뤄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소절만 몇 번 반복하며 목사님이 서툴게 반주를 맞추는데, 나에게는 그것마저 생소하다. 자리로 돌아오더니 '사랑해'라는 노래도 안다고 조금 부른다. 치앙마이에서 대학까지 다닌다는 그녀는 눈 속에 핀 한 송이 꽃 같다.
오늘의 행사를 진행하는 쑤찬이 '119, 서울 소방대'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쓰인 화재 진압용 옷을 입었다. 아마 구호품인 듯한데, 전번 오바또 정자에서도 박스 안에 가득 들어 뒹굴고 있는 옷들을 보았다. 이곳의 경제 사정은 구호품을 받지 않아도 될 듯한데, 고산족들이 사는 사정은 다르리라. 관중석에는 돼지막처럼 짚이 깔려있고 그 위에 사람들이 담요를 뒤집어쓰고 앉아 있다. 가운데는 모닥불도 하나 타오르고 있다.
젊은이들을 확보하기 위해 놀이 중심으로 변해가는 것 같은 교회, 심지어 서양의 교회들은 생존을 위해 갖가지 놀거리들을 설치해 가며 예배를 보는 모습을 보면,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라는 예수님의 정신이 사라져 가고, 신앙의 본질부터 변해가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가 들 때도 있다.
약한 전력에 전등을 너무 많이 설치했는지 불빛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고, 누군가 "뿌알리, 뿌알리(빨리빨리)하는데, 빨리 말하니 신기하게 우리 발음과 닮았다. 10시가 넘어 행사가 끝나고 나오는데 조그만 마을 전등불이 하나 달랑거리며, 아주머니가 막 흙빛 국수를 말아와 판다. 산길을 올라오니 입구에 모닥불이 켜져 있고 열기가 식지 않은 청년들이 모닥불 위 주전자 물로 커피를 타 마신다. 계곡 쪽으로 찬바람이 몰려가는 소리가 더욱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연재를 마치며…
한 해가 끝나가는 겨울의 길목에서 다시 매일신문 독자들에게 지면으로나마 작별 인사를 드립니다.
8개월 동안 '오지 기행, 아시아를 가다'를 연재하면서 나름 아시아에 사는 소수 민족의 문화와 언어, 민속 등을 있는 그대로 전해 드리려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의 할아버지에 할아버지들이 독재와 가난을 피해 무작정 남의 나라 국경을 넘은 모습에서, 끝없이 대륙진출을 꾀하던 오랜 시절 가난했던 우리 민족의 모습이나, 일제의 압박과 독립의 염원으로 무작정 국경을 넘어야 했던 선인들의 모습도 오버랩되었습니다.
무릇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다만, 먹고살기 위해 순하디 순한 이름, 소수 민족이라는 굴레 아래 남의 눈치를 보며 그것도 오지 산속으로 숨어든 사람들. 우리가 그들의 슬픈 역사와 환경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그들을 만나거나, 가난하기 때문에, 소수라는 이름으로 탄압받는 일이 생기면 적극 그들을 지지해 주면 좋겠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라는 이름 때문에, 탄압을 받고, 전쟁이라는 광기의 이름으로 희생되는 민족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고 성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큰절 올리며, 또 다른 지면을 통해 인사드리기를 소망합니다. 새해 여러분의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시길 바라며,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윤재훈(오지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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