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라이트 형제와 비차

입력 2014-12-19 07:20:35

비행기가 굉음을 내며 이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무심히 들었을 요란한 소리에 긴장이 되었습니다. 인류가 하늘을 날기 시작한 지 111년. 불과 한 세기 전으로 되돌아가 인간이 새처럼 날기 위해 시도했던 많은 일들을 생각해보니, 그동안 당연하게 누려왔던 과학기술의 혜택이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미국 과학박물관의 전시물은 압도적이었습니다. 세계 최초라고 불리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인류 최초로 비행에 성공한 라이트 형제의 플라이어호도 있었습니다. 세기사적 의의를 간직한 실물전시물들은 감동을 전해줌과 동시에 옆에 쓰여 있는 작은 글씨조차 자세히 읽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비행의 역사를 써내려간 라이트 형제는 자전거 수리공이었습니다. 그들은 엘리트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었고 천재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하늘을 날기 위한 시도가 여러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무인증기항공기의 성공이 있었고 글라이더가 제작되었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이들의 성공에 크게 자극받았습니다. 그들에게 세계 최초의 유인동력비행이라는 딱지가 붙기까지 같은 종류의 연구가 미국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과학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그의 저서 총균쇠에서 '기술은 어느 영웅의 개별적인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누적된 행동을 통해서 발전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라이트 형제는 어느 날 홀연히 떠오른 천재적 영감에 의해서 비행기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그들 이전에 비행기 개발에 성공하거나 실패했던 다른 사람들의 수많은 경험을 교과서 삼아 비행기를 발명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임진왜란 당시 김제 출신의 정평구가 비차라는 비행기구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평구는 무관 말단직으로 임진왜란 당시 화약을 다루는 임무를 맡았다고 합니다. 그는 진주성이 왜군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 믿거나 말거나 비차로 성주를 태우고 10m 높이에서 30리(약 12㎞)를 날았다고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비차의 모양과 구조, 비행원리에 대한 당시의 기록은 없습니다. 만일 우리에게도 비차가 만들어지기 전과 후에 여러 사람들에 의해 비행기구 개발에 관한 시도가 있었고 그것이 최소한의 기록으로라도 전해졌다면 비차가 라이트 형제를 300년 앞지른 인류 최초의 유인비행으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커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1592년 비차가 실제로 존재했다면, 우리에게 그것을 발전시킬 동력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쉽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세계 최초를 자랑하는 발명품들은 단지 그것을 사용하고 발전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을 수집하고 보존하고 전시할 공간과 인력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전문가에 의해 멋지게 포장된 인류 최초의 실물전시물들은 전 세계인들의 발걸음을 그곳으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을 그러모으고 있는 최초의 유물들은 다시 단순히 그것을 과학박물관에 전시하여 보여주는 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많은 과학자를 그곳에 상주시켜 자연과학의 전 분야, 설사 그것이 바퀴벌레나 박쥐에 대한 것일지라도 연구를 진행하게 하였고 그 성과를 전시하게 하였고 또다시 그것을 대중에게 교육할 필요성까지 만들어냈습니다.

살아있는 교육을 받은 대중들은 자연히 과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관심을 가지게 되는 집단을 만들 것이고 그중에 누군가는 다시 과학기술의 발전에 이바지하게 될 것입니다. 가치 있는 발명과 발견이 과학박물관에서의 수집, 보존, 전시 및 다양한 분야에서의 연구와 대중을 교육하기 위한 필요를 만들어내고 다시 사회에서 가치 있는 것을 창출하는 선순환 구조를 이루었습니다. 세계 최초는 결국 세계 최대와 세계 최고로 가는 지름길이었습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가 아니라 발명은 필요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필요를 창출할 우리의 라이트 형제는 언제쯤 나타날까요?

백옥경/구미과학관 관장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