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연방의 종식을 목격한 국민대 교수 안드레이 란코프는 독재정권이 붕괴될 때 대안 엘리트가 매우 중요함을 강조한다. 1970년대 말부터 소련 지식인들은 체제를 냉소하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이런 체제 냉소는 반체제운동을 예비했다. 한국이 군사독재 이후 연쇄파국 대신 민주정부를 건립할 수 있었던 것도 거대한 대안 엘리트 세력의 존재였음은 주지하는 바다.
하지만 유례없는 경찰국가인 북한에는 대안세력이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란코프는 북한 외부에 있는 국내 북한이탈주민 공동체가 대안 엘리트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2만 7천 명의 국내 북한이탈주민 중 일부라도 이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가 정착지원을 전향적으로 확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든다.
첫째, 북한이탈주민들은 북한사람들에게 '자유'에 대한 효과적인 정보 창구가 된다. 숙련전문직에 종사하는 북한이탈주민들이 많아질수록 북한에 더 큰 변화를 줄 수 있는 정보를 보낼 가능성이 커진다. 둘째, 북한이탈주민 지식인들은 국내 북한이탈주민 공동체의 역할모델이 된다. 소수자 공동체는 낮은 지위가 세대 간에 반복되는 자기영속적 측면이 크기에 성공적 역할모델은 공동체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다.
한반도 정세 전문가들의 국내 북한이탈주민들에 대한 이 같은 기대는 일견 타당하다. 하지만 란코프 등이 바라는 북한이탈주민들에 대한 전향적 정착지원 확대는 사회 일반이 가지는 소수자에 대한 태도가 획기적으로 변하기 전까지는 요원한 일이다. 여전히 정착지원 제도가 미비하며, 절대다수는 비숙련직에 종사함에도 이 수준의 지원마저 '특혜'라는 언어도단으로 공격하는 세력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회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세력이 집요하게 들이대는 '무임승차 이데올로기'는 함께해야만 겨우 생존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비전마저 좀먹는다.
나는 올해 3월부터 북한이탈주민 대학생들과 독서토론 및 작문 모임을 지속했다. 해를 넘기면서 지속되는 과정에서 이들 역시 소수자들이 겪는 '시선의 감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을 관찰했다. 그러나 이들은 그에 대해 불평하기보다는 한국사회 안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길 원하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시혜정책도, 온정어린 눈길도 아니었다. 유난스럽게 배타적인 우리 사회를 다채롭게 구성하는 인자 중 하나로 존중받는 것이었다. 북한이탈주민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소수자를 위한 존중과 궤를 같이한다.
'공감'으로 집약되는 소수자에 대한 존중은 우리의 삶 곳곳에 숨어 있는 그들을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하여 함께 부대끼며,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고, 다른 면이 있다면 왜 다른지도 알아가는 것이 순서다. 이기적이지만은 않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만나서 공감하는 것에서부터 문제의 실타래는 풀리기 시작할 것이다.
또한 북한이탈주민들을 만나는 것은 단순히 '만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인터넷 매체와 각종 채널의 홍수 속에서 미디어에는 온갖 자극적 소재의 북한 관련 기사와 프로그램이 범람한다. 미디어에 나오는 자극적 이미지는 무분별하게 소비하면서, 정작 바로 옆에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대구경북의 북한이탈주민 1천700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을 본 적은 거의 없다. 있는지조차 모르고, 관심을 가진다고 해도 '사람'에 대한 관심보다는 어떻게 하면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골몰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목격한다.
그러나 남북한을 두루 경험해온 북한이탈주민들은, 이 땅에서 '과연 내가 여기 속해 있는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그들은 우리에게 소중한 또 하나의 이웃이며 가족이다. 분단체제가 한국사회의 발목을 다방면으로 붙잡고 있는 지금, 우리는 북한의 실체를 정확히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곳에서 살아왔으며 지금 이곳을 살고 있는 '사람'의 민낯을 마주해야 한다. 내수용 정략적 이해(利害)가 아니라, 사람 간의 이해(理解)를 통해 같음을 알고, 다름을 인정하며, 함께 사는 법을 깨치는 것은 거창한 이념의 발로가 아니라 극단주의가 횡행하는 위기의 시대에 필수불가결한 생존 매뉴얼이다.
이현석(의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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