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지켜라" 버려졌던 산성 185년 만에 전략적 요충지로 부활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선봉대 1만8천700명이 700여 척의 병선을 타고 부산포로 쳐들어왔다. 가토 기요마사와 구로다 나가마사의 2번대, 3번대가 각각 부산과 김해에 상륙했다. 총 병력은 20만 명이 넘었다. 순변사 이일(李鎰)이 상주에서 패했고, 도순변사 신립(申砬)이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웠으나 패했다.
◆잇단 패퇴, 금오산성 필요성 절실
싸움다운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조선군은 패퇴했고, 일본군은 충주를 거쳐 5월 2일 한양에 입성했다. 부산에 상륙한 지 18일 만이었다. 선조 임금은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란했다.
6월 14일 고니시가 이끄는 일본군은 평양을 함락했고, 17일 가토군은 함경도를 유린하고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았다.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한 지 2개월 만에 전 국토가 일본군에 유린된 것이다. 선조 임금은 명나라 군대의 등에 업혀 다시 궁궐로 돌아왔지만 밤낮으로 좌불안석이었다. 전쟁 없는 세월이 이어지면서 조선은 전쟁을 아예 잊어버렸고, 일단 적이 쳐들어오면 막을 방책이 없다는 것을 일본군의 전광석화 같은 진격에서 보았던 것이다.
선조 28년(1595) 8월. 비변사에서 상계를 올렸다. "왜적이 다시는 내륙을 넘보지 못하도록 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을 수축하여 대진을 만들 것을 아뢰옵니다."
이에 도체찰사 이원익이 그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아뢰었다. 이렇게 해서 1410년 개수된 이래(조선태종 10) 185년 동안 버려졌던 금오산성이 대대적인 수축에 들어갔다. 기록에 따르면 금오산성 수축은 당시 선산부사 배설을 중심으로 승병대장 유정이 함께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선산부사 배설, 금오산성 수축
배설은 산성을 수축하고 성내 진중에 구정칠택(九井七澤), 즉 아홉 개의 샘과 일곱 개의 못을 팠다. '선산부사 배설 축 금오산성 천 구정칠택'(善山府使 裵楔 築 金烏山城 穿 九井七澤)이라는 글귀가 대혜폭포 아래 도선굴로 가는 길목 바위에 새겨져 있다. 산성이 전략적 가치를 발휘하는 데 많은 물이 필요함을 알았던 선산부사 배설이 곳곳에 못과 샘을 팠던 것이다. 이로써 185년 동안 버려졌던 금오산성은 영남의 전략적 요충지로 거듭났다.
선조 30년(1597) 1월,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은 산성 고수작전에 따라 삼남의 모든 산성을 굳게 지키게 했다. 도체찰사 이원익은 임금의 명을 받아 금오산성을 전략본영으로 삼아 일본군을 막았다. 특히 상주목사 정기룡은 금오산성을 전략본영으로 인근 28개 군의 군병을 이끌고 고령까지 진출해 일본군 1만2천 명을 섬멸했다.
조선군이 금오산성을 본영으로 작전을 전개하자 정유년 9월 일본군은 대규모 군사를 동원해 금오산성을 공격했으며, 이때 산성은 많은 피해를 보았다. 임진왜란으로 금오산성의 전략적 가치를 깨달았던 선조임금은 1606년 3월 다시 대대적인 수축을 단행했다.
불탄 흔적을 지우고, 빈집을 없앴으며, 깨지고 흩어진 기와를 모아 객사'무기고'사창(곡식을 모아두는 창고)'승군이 묵을 승실 등을 건설했다. 전란으로 묻힌 연못을 고치고, 샘물도 다시 팠다. 문루와 포루는 물론이고 무기를 제작할 수 있는 대장간까지 갖추었다.
성벽도 말끔하게 수리했는데, 보수공사에만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그야말로 금오산성은 조선의 남쪽을 지키는 든든한 요새였던 것이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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