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달성 꽃피다] <10>유명 사찰 국내 복원 첫 사례

입력 2014-12-12 07:09:36

일제때 강제 폐사 일연 스님 대견사 '100년만에 되살아나다'

중창하기 전 설경의 비슬산 대견사지 모습. 달성군과 불교 조계종 동화사는 100여 년 전에 일제가 강제폐사한 비슬산 대견사를 중창하게 된다. 달성군 제공
중창하기 전 설경의 비슬산 대견사지 모습. 달성군과 불교 조계종 동화사는 100여 년 전에 일제가 강제폐사한 비슬산 대견사를 중창하게 된다. 달성군 제공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더불어 우리 고대사 연구에 가장 귀중한 책으로 꼽힌다. 특히 삼국사기에 누락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육당 최남선은 "내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야 할 경우를 가정한다면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라고 했을 정도다.

그러나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1206~1289)이 달성군의 비슬산에서 오랜 기간 머물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대부분 삼국유사를 완성하고 입적할 때까지 몇 년간 머무른 군위의 인각사를 떠올리곤 한다. 일연은 35년 동안 비슬산에 머물며 삼국유사 집필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 일연의 비슬산 시절은 22세(1227년)부터 44세(1249년)까지 22년간과, 59세(1264년)부터 72세(1277년)까지 13년 등 35년에 이른다.

◆까다로운 대견사 중창

달성군이 비슬산에서 일연의 발자취를 되찾기 위한 노력은 일제강점기 때 강제 폐사된 대견사의 중창으로 빛을 봤다. 지난 3'1절에는 새로 중창된 대견사가 첫 산문을 여는 개산식이 열렸다. 일연의 비슬산 시절에는 대견사가 아닌 보당암(寶幢庵)이었다. 여러 문헌상 당시의 보당암이 오랜 시간이 흐르는 과정에서 지금의 대견사로 변천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연의 첫 법명은 볼 '견(見)', 밝을 '명(明)' 견명(見明)이다. 대견사는 큰 '대(大)', 볼 '견(見)' 이다. 혹자는 이런 연유를 들어 일연의 법명에서 '견(見)' 자를 따 크게 본다는 의미의 '대견사'(大見寺)로 이름을 지은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지난 2010년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김문오 달성군수는 취임 일성으로 "폐사된 대견사를 복원, 중창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사실 대견사 중창은 과거 관선시절 때부터 부임해오는 군수마다 거의 한 번씩은 시도해본 사업이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이후 민선 군수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그동안 달성을 거쳐 간 군수들이 대견사 중창에 실패한 가장 큰 걸림돌은 '문화재보호법'이었다. 현행 문화재보호법은 문화재의 보존'관리 및 활용은 '원형 유지'를 기본원칙으로 하는 등 매우 까다롭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국내에서 폐사된 문화재급 사찰들의 경우 복원 내지는 중창된 사례를 찾기 힘들다.

대견사는 현재도 남아있는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42호인 삼층석탑과 대견사 하부지역 골짜기를 중심으로 형성된 천연기념물 제435호 비슬산 암괴류가 발목을 잡았다. 이 같은 사실을 간파한 김 군수는 취임한 그해 11월 문화재보호법이 아닌 '건축법'으로 대견사 중창을 시도하기로 했다. 또 중창사업 업무를 문화재 관련부서에서 정책사업과로 이관했다. 이 부서는 자신의 공약사업을 실행하는 부서다.

김 군수는 "대견사터의 삼층석탑 등 문화재에 손을 대지 않고 원형대로 보존하는 대신에 폐사돼 사라진 옛 사찰의 건축물을 다시 짓겠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문화재청을 대상으로 설득에 나섰다.

대견사 중창사업이 '대견사지 관광명소화 사업'으로 명명되는 등 업무가 일사천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책사업과 직원들은 중창사업 허가안을 들고 문화재청을 드나들며 사업의 당위성 알리기에 온 힘을 쏟았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다. 가장 난제였던 국가지정문화재와 대구시지정문화재에 대한 현상변경허가가 한 달여 만에 문화재청으로부터 났다. 달성군은 곧바로 고건축전문가를 중심으로 대학의 건축학과 교수와 지역유지, 군의원 등 15명으로 구성된 '대견사 중창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동화사와 다각적인 협력으로 박차

문화재청으로부터 대견사지 중창에 따른 현상변경허가가 떨어졌다는 소문이 불교계로 번지자 한 불교종단에서 달성군을 찾아왔다. 이 종단 측은 "50억~100억원을 들여 사찰을 건축하고 수백억원의 기금을 달성군에 내놓겠다. 20년 후에는 사찰을 달성군에 기부채납하겠다"고 제안했다.

달성군 입장에서는 이 불교종단이 제시한 내용을 액면 그대로 실행할 경우 큰 이익을 챙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달성군은 크게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일단 여유를 갖고 다각적인 차원에서 검토를 벌였다.

달성군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6월 23일 자 조선총독관방 총무국에서 발간한 조선총독부관보 제1천466호에서 '동화사(본사) 말사인 대견사의 폐지를 6월 20일 자로 허가한다'는 기록을 확인했다. 대견사 중창사업의 기득권은 대견사의 본사인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 팔공총림 동화사로 주어져야 한다는 대목이다.

달성군이 이 같은 사실을 동화사 측에 알리자 동화사 측은 반색하고 적극성을 보였다. 이후 김 군수와 동화사 주지인 성문 스님이 대견사 중창 사업에 대해 수차례에 걸쳐 논의과정을 거치게 된다.

동화사 측은 대견사 중창불사 제안서를 달성군에 제출했다. 이를 두고 달성군의 대견사 중창추진위원회도 거듭 열렸다. 불교 조계종은 중앙종단 차원에서 자승 총무원장이 직접 대견사지를 방문했고, 중창불사 성취발원 대법회도 가졌다.

결국 대견사 중창은 동화사 측에서 맡는 것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대견사의 터(3천633㎡)가 폐사되는 과정에서 소유권이 동화사가 아닌 달성군으로 등기돼 있어 동화사 측으로서는 달성군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 됐다.

동화사 측은 대견사 절터의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법리적 검토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동화사 측은 중창사업이 한참 진행돼 가는 도중에 달성군과 땅 송사를 벌인다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이를 과감히 접은 것으로 전해졌다.

달성군과 동화사는 중창 후 기본재산 수입과 불공 수입, 불전 수입, 사업 수입 등 전체 일반회계 수입의 30%를 달성군에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납부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비슬산 대견사 중창을 위한 협약(MOU)'을 체결하게 된다.

이 같은 협약체결에 앞서 동화사 측은 전체 수입의 20% 정도를 달성군의 문화진흥기금으로 내놓겠다는 입장을 완강하게 고수했으나 결국은 달성군이 주장한 30%에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화사 측은 대견사를 어떻게 중창할 것인가에 대해 설계공모에 나섰다. 총 50억원의 예산으로 대웅전 64.17㎡, 선당 58.32㎡, 종무소 58.32㎡, 산신각 5.04㎡ 등 규모로 짓겠다는 계획을 최종 확정하게 된다.

달성 김성우 기자 swkim@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