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영화사

입력 2014-12-05 08:00:00

한국에는 왜 도호, 쇼치쿠, 혹은 폭스, 워너, 파라마운트 같은 100년 역사의 영화 명가들이 없을까? 식민지를 경험해서? 전쟁 탓에? 찢어지게 가난했기 때문에? 글쎄, 만약 그런 이유라면 100년은 어렵더라도 최소한 30~40년 된 영화사라도 눈에 띄어야 하질 않나. 현실은 한국에서는 30~40년은커녕 10년 이상 가는 영화사도 찾아보기 힘들다. 쏟아지는 영화만큼이나 많은 생경한 영화사 로고들만이 명멸을 거듭해 갈 뿐이다. 대체 왜?

영화는 무엇을 가지고 만드나? 시나리오를 가지고 만든다. 그렇다면 영화사는 이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시나리오 작가와 계약을 맺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는 시나리오 작가를 위한 '표준계약서'가 없다. 작가가 좋은 작품을 써서 영화사로 찾아가면 영화사는 갖은 핑계를 다 대며 돈을 적게 줄 궁리만 한다. 최저임금보다 더 낮은 임금으로 시나리오를 몇 편 공급해 준 뒤, 이제 좀 큰 소리로 정당한 고료를 요구하면 영화사의 대답은 이렇다. "저 새끼, 돈독 올랐네."

이 노릇으로는 도저히 생계를 꾸릴 수 없겠다는 것을 깨달은 작가들은 포기하고 생업을 찾거나, TV드라마나 웹툰으로 빠진다. 버티는 자들은 이제 필사적으로 그나마 수익 분배를 요구할 수 있는 '감독'이 되고자 한다. 재능과 운이 맞아 들어 '입봉'을 하고 나아가 흥행까지 되고 나면, 이제 그는 지금까지 당했던 온갖 서러움을 근거로 새로운 영화사의 창립주가 된다. 소박한 작가의 꿈이 이제 '회사 사장님'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전문성이 없다 보니 계속 잘나갈 리가 없다. 기존 영화사들과 박 터지게 경쟁하며 조금 뜯어먹다가 결국 쓰러진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한국의 영화판에서 무한 반복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영화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만든다. 그렇다면 영화사는 그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에게 적어도 먹고살 수 있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지금 당장 형편이 어려워 작가에게 줄 돈이 없다면, 적어도 그에게 미래를 약속해야 한다. 영화 수익의 단 1퍼센트만이라도 작가들에게 배분되어 왔다면, 이런 미친 듯한 영화사 열국지는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제작자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있다. "배우도 있고, 투자자도 있고, 감독도 있는데, 책(시나리오)이 없어. 책이." 영화가 대박이 나면 배우도, 투자자도, 감독도 떼돈을 버는 마당에, 작가는 그 파티에 초대조차 해주지 않고서는, 무슨 멍청한 소리를 지껄이고들 있나? 제갈량도 사마의도 장량도 자기들이 다 쫓아 놓고, "병사도, 군자금도, 장수도 있는데, 모사가 없어 못 해먹겠다"라는 난세에서 100년 왕조는 그야말로 꿈일 뿐.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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