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에는 나무틀 놓고 볏단 내리치며 타작, 개학식엔 아줌마들 국수 삶아와
◆가을걷이
쑤찬의 논에는 온 식구들이 달라붙어 막바지 추수가 한창이다.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 여러 개의 물벼 논은 상당히 넓다. 논에 커다란 포장지를 깔고 그 위에 나무틀을 놓고 동생과 함께 볏단을 내려치는데 그때마다 쏴아쏴아, 소나기 소리가 난다. 마치 세상 밖으로 달려나가고 싶은 장난꾸러기들처럼 사방으로 쌀알이 튄다. 팔 남매 장손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이 오지 산마을에서 살아가는 삶이 그리 만만치 않은지 허리에는 넓은 압박 띠를 둘렀다. 그는 농사와 오바또 근무, 두 가지 일을 한다.
어머니와 아내, 동생 부부, 몽족 마을 중학교에 다니는 15살 조카까지 다 붙어 있다.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벼 짚단을 어깨에 지고 오는데, 문득 추수한 곡식을 서로 나누어 주려던 '의좋은 형제' 이야기가 생각난다.
잠깐 쉬는 사이 할머니가 환타 뚜껑을 열자 네다섯 살 되는 손자들 셋이 한꺼번에 달려든다. 아이들 먼저 두어 잔씩 먹였지만 할머니 옆에 붙어 떠나지 않을 태세다. 할머니가 한 잔 입으로 가져가자 서로 빼앗아 간다. 한 아이의 손에는 살아있는 새끼 쥐가 들려 있다. 언제 잡았을까, 축 늘어져 있는데, 과자를 주며 놓아 달라고 해도 연신 고개만 흔든다. 한참이나 할머니와 실랑이를 하더니 커다란 병이 두 개 다 바닥이 나자 그제서야 포기하는 듯하다.
다섯 살배기 큰 손녀는 그래도 아쉬운지 바닥에 조금 남은 주황빛 방울까지 고개를 젖히고 털어 넣자, 동생들은 아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단물은 먹어도 먹어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 모양이다. 환타가 떨어지자 아이들은 가지고 놀던 쥐를 가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베어 낸 벼 그루터기 사이로 폴짝 거리며 뛰어간다.
◆새 학기
사철 무더운 동남아 국가들, 그중에서도 4월은 일 년 중 가장 더운 계절의 초입이며 타일랜드나 라오스 등은 이때가 일 년이 시작되는 새해이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최대의 물과 광란의 축제 송크란도 이때 열리며 방학도 시작된다.
국기와 붓다기가 올라가고 아이들이 부동자세를 취한다. 운동장 가운데는 황금 붓다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온화한 미소로 앉아 있다. 마을에는 판자를 잇대어 지은 성당과 교회가 있고, 역사가 오래지 않은 오지마을들에 절은 없지만, 그래도 이 나라의 국교는 불교다. 먼먼 옛날 우리처럼.
개학식을 마치자 오바또에서 동네 아줌마들이 국수를 삶아와 운동장 언저리에서 아이들에게 나누어 준다. 아이들은 화단이나 운동장 턱에 삼삼오오 앉아 점심을 먹는데, 대부분 주머니에서 비닐봉지에 싸온 주먹밥을 꺼낸다. 한창 뛰노는 아이들이니 오죽 배가 고프랴. 따라온 학부모들도 급하게 국수 한 그릇씩을 만다. 화단에는 사철 꽃이 피는데 보랏빛 국화 송이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먼지가 내려앉은 학교/조용하던 운동장에
다시 아이들의 소리 왁자해지고/거미줄에 잠자던 노란 거미도
깜짝 놀라 깨어나/길게 은빛 줄을 내리는 학교//
한국에서는/일제 시대 공습을 피해
검정 판자 잇대어 내려오던/그 아득한 학교가
아직도 동그랗게 마을 가운데 남아/아이들의 지저귐 소리에
새 학기를 맞는다 //
그 소리에 잔뜩 물기를 머금었던/꽃봉오리들도
화들짝 깨어나/다시 생기를 찾고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만/잠자리를 희롱하는 오지 산마을//
오랜만에 본 선생님 얼굴에/아이들의 얼굴 다시 해맑아지고
가을 햇살 아래 생글거리며/달음박질하거나
장난질 친다//
아득한 삼한 시대/어디쯤 놓인 것 같은 학교
멀리 황금 논에선 쌀 타작 하는/아빠의 굵은 근육이 보이는 듯
그 소리에 저절로 배가 불러오고/언제 왔다 갔을까
창틀에 하얗게 허물을 벗어놓고 간 뱀/그 사이 숲 속 어디쯤
둥지라도 틀었는지/아기 새들도 눈 시리게
하늘을 나는/아득한 전설 속
어디쯤에 있는 산골 학교//
아름다운 동쪽 나라/한국에서는 사라진
아이들의 지저귐에/하루해가 뜨고 지는 학교
새 학기-깔리양 빠가요족* 학교에서/윤재훈
◆오지 속의 오지 마을
포장길과 비포장길을 따라 몇 시간을 가야 만날 수 있는 마을, 그곳에는 '깔리양 빠가요족'이라 불리는 종족들이 살고 있다. 소수의 여행자들에게는 롱 넥 피플(long neck people)이 더 살갑게 다가올 수 있지만, 분류만 비슷할 뿐 언어와 전통, 옷들도 다르게 입고 산다. 또 거기에서도 다시 여러 개의 극소수 민족으로 나누어진다. 이곳에는 특히 수많은 종족들이 작은 마을을 이루고 국경을 따라 엄청나게 모여 산다.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가난과 독재가 얼마나 심하면 대대로 살던 고향 산천을 버리고 무작정 국경을 넘어 이민족으로 이 오지까지 숨어들었을까.
현지인들이 살지 않는 가장 깊은 산 속으로 숨어 우리의 뇌리에서도 사라져 가는 화전을 일구며, 그 가파른 산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르락내리락 하며 살고 있다.
타일랜드 정부에서도 굳이 그들을 막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사실 정부에서 천문학적인 돈까지 투자하여 국토 균형 개발을 해야 할 처지에, 이 오지를 개간해주고 아시아에서 쌀 수출국 1위까지 하는 데 혁혁한 주춧돌이 되었지 않았는가. 치산치수가 후세에 백성들이 군주를 평가하게 될 가장 큰 덕목이 아닌가. 백성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것이 최고인데, 자국민들의 목숨줄인 식량까지 자급자족하고 수출까지 해줄 수 있게 만들어 주었으니 내심 오직 고마우랴.
*타일랜드, 미얀마 등 동남아 국경에 걸쳐 많이 살고 있는 민족.
윤재훈(오지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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