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 축조집단 주축으로 신라와 맞대결"…영남대 국사학과 이형우 교수

입력 2014-12-03 08:00:00

"이서국은 묘한 위치에서 사로국과 인접해 자웅을 겨뤘고, 한 때 사로국을 '위기'에 빠뜨린 큰 나라로 볼 수 있습니다."

영남대 국사학과 이형우 교수는 이서국이 고인돌 축조집단을 주축으로 해서 강성한 정치세력을 키워 신라와 대결구도를 벌였다고 했다. 신라가 탈해집단의 철기문화를 유입하며 월성집단과 합쳐 비약적인 성장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서국도 이른 시기에 철기문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청도 이서면 서원리 구릉에서 학술조사를 벌이다 토기를 발견하는 등 이 지역에도 고대 고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이서국이 2세기 초엽 신라에 일찍 편입됐다고 보는 그는 편입시기 등의 영향으로 대규모 고분군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서국은 무엇보다 신라의 입장에서 서진정책을 펴기 위한 교통과 군사요지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신라의 서남방 진출 루트는 청도 동창천, 유천(오례산성)을 거쳐 밀양, 삼랑진, 김해를 정벌했고, 또 하나는 청도천을 따라 각남면, 풍각면을 거쳐 창녕 방면 가야를 공략했다는 것이다. 특히 가야 정벌의 첫발이 이서국이었으며, 이서국이 김해, 창원지역과 교류한 관계에도 주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라가 국가차원에서 중요시하게 여겼던 것으로 나라의 큰 제사를 지내는 3산의 하나를 청도 혈례(오례산성)에 두었다는 것은 이 지역이 신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서국 흡수 이후에도 청도 지역은 신라가 운문사에 오작갑사를 창건하고, 신라 화랑정신 발상지이며 군사훈련장으로 삼국통일을 달성하는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청도 노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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