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읽기] 민주화 됐다지만…더 진해진 '갑을 관계'

입력 2014-11-29 07:23:08

예술로 만난 사회/김호기 지음/돌베개 펴냄

암행어사가 된 정약용은 1794년 경기도 파주의 한 마을을 둘러보고 '적성촌에서'라는 시를 썼다. 관료와 고리대금업자들이 백성으로부터 수저며 무쇠 솥을 빼앗는 장면을 기록했다. 당시 정조는 개혁 정책을 펴고 있었다. 하지만 백성들의 삶은 여전히 고단했다. 이 장면에서 저자는 요즘 우리 사회의 '갑을 관계'를 떠올린다. 생존권을 위협받는 것은 물론 인간적으로 무시받는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분명 민주화와 산업화는 함께 진전됐는데, '을'의 아픔과 저항이 계속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책은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의 '사회학의 눈으로 본 예술 에세이' 50편을 수록했다. 시'소설'희곡'회화'조각'사진'만화'음악'건축'영화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을 소재로 썼다. 저자는 예술의 1차적 의미로 '공감과 위안'을 꼽는다. 어차피 예술은 인간이 만든다. 그러니 같은 인간끼리 공감하고 연대감을 갖게 해주는 게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라는 것.

저자는 요즘 팽배한 개인주의에 대해 이렇게 본다. 1980년대 '큰 이야기'의 운동정치에 맞서 1990년대 이후 신세대들은 '작은 이야기들'이라는 삶의 정치를 보여줬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가 전환점에 있다. 하지만 자율과 책임을 자각하는 시민적 개인주의라기보다는 감성과 욕망을 소비하는 이기적 개인주의에 머무르고 만다. 지금 한국의 개인주의는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 모든 세대가 집단의 욕망에 포섭되지 않고, 자기 시대의 주인공이 되는 때는 언제쯤 올까.

'이방인으로 왔다가 이방인으로 떠나네'라는 노랫말로 시작하는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는 유목사회를 살아갈 힌트를 던져준다. '노마드'(유목민)는 19세기 낭만주의 시대뿐만 아니라 21세기 정보화 시대, 글로벌 시대에도 어울리는 인간형이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지금 갈림길 앞에 서 있다. '유랑민'이 될 것이냐, '피란민'이 될 것이냐. 유랑민은 자발적으로 새로운 목초지를 찾는다. 하지만 피란민은 전쟁과 같은 외부의 위협으로 쫓겨나듯 떠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입을 피해는 최대한 줄이고 이익을 찾는데 골몰할 뿐, 공동체는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지금 우리를 피란민형 유목민으로 내모는 외부의 위협은 무엇일까.

이 밖에도 저자는 요한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로 시대정신을, 이성복의 시 '모래내 1978년'으로 반인간적 학벌사회를, 정도전이 이름 지은 '경복궁 근정전'으로 지식인의 시대적 초상을, 이쾌대의 그림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으로 한국적 표준의 필요성을, 봉준호의 영화 '설국열차'로 자본주의 문명의 미래를 얘기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던져야 질문과 찾아야 할 답이 참 많다. 316쪽, 1만5천원.

황희진 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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