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갑사를 찾아간다. 전라도 영광군 불갑산 아래 있는 불갑사는 말로만 들었을 뿐 감히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구에서 길이 먼 데다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서해 여행길에 불갑사 꽃무릇 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보니 슬슬 구미가 당기기 시작했다.
흔히들 '소문난 잔치엔 먹을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 불갑사는 '크게 소문이 안 났으니 먹을 게 많겠네'란 농담을 해 가며 산문에 들어섰다. 그 말엔 일리가 있었다. 불갑사는 백제 불교가 전래되면서 처음으로 지은 최초 사찰이었다. 최초와 최고란 수식이 붙는 것들은 그 속에 감춰진 무엇이 있기 마련이다.
일주문 밖 광장에는 농악대회가 열리고 있는지 꽹과리와 장구 소리가 요란하고 붉고 푸른 천을 몸에 두른 농악패들이 재바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왼쪽 길로 접어들어 법당을 향해 걷고 있으니 불경이 아닌 귀에 익은 팝과 발라드가 쉴 새 없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 백제 불교 최초 사찰이라더니 최초의 값을 신식 음악으로 가름하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소리의 발원지를 찾아들었다.
그늘 짙은 느티나무 아래 중년의 스님이 기타를 치며 계속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앤디 윌리엄스가 부른 '문 리버'(Moon river)에서 귀가 뚫려 제자리에 서서 한참 듣고 있으니 '원 서머 나이트' '앤드 아이 러브 허' '사랑이 지나가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진다. 썩 잘 부르는 건 아니지만, 곡들이 하나같이 폐부를 찌르는 감성적인 것들이어서 '스님이 세속의 때를 벗지 못하고 있네'란 생각이 들었다.
꽃무릇 화원을 보려고 불갑사에 들렀는데 나도 모르는 새 노래 몇 곡에 홀려 정신줄을 놓아 버린 셈이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사랑을 노래하는 스님 발밑에도 온통 꽃무릇이 지천이고, 시선이 닿는 빈 하늘 외에는 모두가 붉은 양탄자를 깐 듯한 꽃무릇이 질펀하게 널려 있었다.
꽃무릇의 꽃말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짐작건대 스님도 못 이룬 그 어떤 사랑 때문에 불가에 귀의한 것은 혹시 아닐까. 참선과 염불로 마음을 다스려 보려 했지만 한 번 기울어진 마음을 곧추세우기가 어려웠나 보다. 그래서 기타를 둘러메고 옛날에 불렀던 그 노래를 꽃무릇 멍석 위에서 다시 펼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가까이 다가가 스님에게 말을 걸어 보려다가 CD 하나를 사고 돌아섰다. 음반에 적힌 스님의 법명은 무상(無相)이었다.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상인데 팝송을 통해 무상의 길로 접어들려 하나 보네.
꽃무릇을 석산(石蒜)이라고도 하고 상사화로 부르기도 한다. 엄밀히 따지면 약간의 차이는 있다. 상사화는 꽃무릇보다 한두 달 일찍 피고 꽃잎 색깔은 연분홍이며 꽃무릇은 붉은색 꽃을 피운다. 그러나 둘 다 꽃은 잎을 만나지 못하고 잎은 꽃을 보지 못한다. 꽃말대로 애틋하고 가여운 꽃이다.
여기서 시인 백석과 기생 진향의 사랑을 그린 '길상사 꽃무릇'이란 이윤정 시인이 쓴 시를 읽어보자. "분명 한 뿌리에서 오는데/ 꽃과 잎이 서로 숨고 숨어/ 백석인듯 진향인듯,/ 두 사람의 타는 가슴인듯/ 길상사 마당 가득 핀 다홍빛 혈서/(중략) 일생토록 서로 보고파만 하면서/ 서로 애터지게 그리워만 하면서/ 열매 한 알 맺어보지 못하고 지는 꽃/ 한 몸이 될 수 없었던 그 한풀이/ 온통 붉은 혈서로 가득하네."
꽃무릇으로 유명한 절은 고창 선운사, 영광 불갑사, 함평 용천사를 꼽을 수 있다. 불갑사 대웅전 뒤를 돌아 구수재에 올라서면 용천사는 바로 발밑이다. 넉넉잡아 두어 시간이면 왕복이 가능하지만 도반들과 팀을 이룬 여행에서 일정 수정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어차피 꽃무릇 터널을 지나 고개를 넘어 용천사로 못 갈 바에는 도량의 경내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대웅전은 연화문과 국화문으로 조각한데다 좌우 칸은 소슬 빗살무늬로 장식하여 사치스러울 정도로 아름답다. 내소사의 꽃살문에 비겨도 크게 손색이 없다.
또 신라 진흥왕 때 연기조사가 목각을 한 사천왕상이 천왕문 안에 모셔져 있다. 이 사천왕상은 설두선사가 조선조 고종 때 불갑사를 중수하면서 폐사로 버려져 있던 전북 무장 연기사에서 옮겨온 걸작이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산사 구석구석으로 밀고 들어온 꽃무릇 파도에 휩쓸려 심한 멀미에 시달렸다. 꽃무릇, '이룰 수 없는 사랑'은 더 아름답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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