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완연하다. 얼마 전에는 사람이 그리워 친구 녀석들을 오랜만에 만났다. 한 친구는 요즘 독서에 취미를 붙였다면서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야~"라고 젠체했고, 삼성 라이온즈 야구단의 팬인 친구는 "무슨 소리, 가을은 야구의 계절이지!"라며 반박했다.
요즘에 우리는 '가을 탄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 높은 하늘, 떨어지는 낙엽의 길거리에만 나서도 보이는 풍경에 괜스레 마음이 외로워지기 때문이다. 외롭다는 말은 곧 '영혼이 허기짐' 다시 말해 '마음이 허하다'는 말과 바꿔 쓸 수 있겠다. 배가 고프면 사실 뭐든지 맛있는 법. 마음이 허기진 요즘에는 음악도 맛있고 책도 맛있다. 마음의 양식으로 저마다 정서를 풍만케 한다면 말이다.
가을이 되면 베토벤과 브람스에 심취하는 나는 구태여 가을은 뭐니 뭐니 해도 음악의 계절이라 생각하기에 3편에 걸쳐 베토벤에 대해 이야기했다. 영화 '카핑 베토벤'을 기준 삼아 첫 편에는 '교향곡 9번'에서의 몇 가지 특징, 그 배경이 되는 말년의 작품철학에 대해서는 둘째 편에 이어서 이야기했다. 마지막 편에는 현악 4중주 '대푸가'(Grosse Fuge)를 증거로 전위 예술가 베토벤을 말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족하다. 부족한 글재주 때문이겠거니와 그의 예술과 삶을 논하기에는 이야깃거리가 너무 많아서기도 하다. 살다 간 세월이야 비록 길지는 않지만 남기고 간 것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할애된 지면이란 것이 있기에 마지막을 "아방가르드한 삶으로 인해 이후 음악인들은 예술가라는 공동의 호(號)를 가진다"는 문장으로 에둘러 이야기한 것이 못내 석연찮아 에필로그를 핑계 삼아서 부연설명하고자 한다.
흔히 베토벤을 최초의 프리랜서 음악가라 한다. 이전 음악가들은 궁정이나 교회 그리고 귀족에 소속돼 음악을 해야 했다. 요즘 언어로 정규직이나 계약직이라 하겠다. 자연스레 고용주(employer)와 고용인(employee)의 관계가 되었고, 고용주 비위를 신경 쓰지 않고서는 음악 활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백작님! 당신은 도대체 무엇이오? 단지 우연히 백작으로 태어난 것일 뿐이오. 나는 무엇이오? 나는 나 자신의 노력으로 오늘을 얻었습니다. 백작은 몇천 명이라도 있을 수 있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겁니다. 하지만 베토벤은 단 한 사람뿐입니다." 후원자 브룬스빅(Brunsvik) 백작에 보냈던 이 유명한 서한, 베토벤에게서는 오히려 앞다퉈 후원하려던 귀족들이 차라리 세칭 을(乙)이었다. 이럴 때는 고용보다 후원이라는 말이 맞다.
베토벤은 예술가의 자존심이 무엇인지 삶과 작품을 통해 내보였다. 가난과 청각장애인, 독신의 삶을 살면서 말이다. 고난을 환희로 승화시킨 예술가, 이것이 내가 이토록 베토벤에 열광하는 이유다.
들꽃이 좋다. 꽃 자체로도 참 예쁘거니와 머금는 진솔한 향기가 좋다. 그리고 무엇 하나가 더 있다. 척박한 땅에서 혹독한 환경에 맞서 스스로를 틔우기 위한 아름다운 몸짓, 바로 생명력이다. 그래서 들꽃은 보살핌 속에 자란 화초보다 가난하지만 거룩하다. 베토벤에게서 배운다. 가난한 들판에도 꽃은 핀다고.
이예진(공연기획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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