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들도 머리 숙여 올라…홍문∼옥황정 9.5km '고행의 계단'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泰山雖高是亦山),'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걱정이 태산….
태산(泰山)은 언제부턴가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의 고유명사처럼 쓰이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도 '集まって泰山, 티끌 모아 태산' 같은 속담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태산의 의미는 대한해협을 건너서도 유효한 모양이다.
높이로만 보면 중국에서 가장 높은 산은 초모랑마. 경치로 관심을 돌려도 태산은 황산이나 장가계, 화산(華山)에 못 미친다.
1,545m에 불과한 산이 어떻게 중국의 대표 산으로 자리매김했으며, 한중일의 문화코드 속에 녹아들었을까.
정말 태산은 '물리적 높이' 이상의 초월적인 산일까.
그 비밀을 찾아 산둥성으로 떠나보자.
◆홍문-중천문-옥황정 코스 추천
산둥성은 중국 대륙 끝 황하 하류지역에 있다. 산둥에서 새벽닭이 울면 서해안에서 들린다고 할 정도로 한국과 가깝다.
직항로가 없는 관계로 보통 칭다오(靑島)에서 기차를 타고 타이안(泰安)에서 내려 트레킹을 진행한다. 중국 명산을 모두 점령(?)해버린 한국의 등산객들이지만 이곳에서 만큼은 국산 아웃도어 물결을 보기 힘들다. 불편한 항공, 교통이 트레커들의 발길을 막아서기 때문이다.
태산의 등산로는 4곳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홍문(紅門)-남천문-옥황정 코스가 주를 이룬다.
계단에 머리를 박고 이마를 18번이나 찧는다는 가파른 코스를 기를 쓰고 오르는 이유는 바로 이 길이 황제, 제후들이 천제를 위해 오르던 어가(御街)이기 때문이다. 공자도 이 길을 따라 올랐다고 전해지고 72명의 황제, 제후가 봉선(封禪)의식을 위해 이 코스를 탔다.
홍문과 옥황정을 잇는 9.5㎞는 대부분 계단으로 이어진다. 세 보진 않았지만 7천736개의 돌계단이 펼쳐진다고 한다.
25리 계단 길이 그다지 지겹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층계를 따라 펼쳐지는 경치 덕이다. 코너를 돌 때마다 새롭게 나타나는 비석, 금석문, 유적지와 거기에 서린 수많은 전설, 에피소드들이 청량제로 다가온다.
안내 책자에 태산 풍경구 내에 1천239개의 비석과 1천277개의 석각, 186곳의 유적'고건축이 있다고 적혀 있으니 유네스코급 문화유산으로 손색이 없다 하겠다.
취재팀이 주차장에 도착한 건 새벽 6시. 랜턴을 켜고 조심스럽게 홍문으로 접어든다. 문을 나서자 좌우에 비문, 석각들이 일행을 맞아 선다.
◆만장비'5대부송'남천문 등 수많은 명소
중천문에 이를 즈음 어둠이 걷혔다. 미명(微明)에 잠겨 있던 태산의 실루엣도 나타났다.
대송산(對松山)에 이르자 청나라 건륭제가 절벽에 새겼다는 만장비(萬丈碑)가 모습을 나타낸다. 글자 한 자의 직경이 1m에 달하고 비문의 길이는 23m, 너비는 13m다. 쉽게 계산해 아파트 8층짜리 한 동만 한 크기다.
중천문부터는 본격적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이때부터 해발은 800m를 넘어서고 계단은 예각으로 급해지기 시작한다. 급경사에 지친 다리를 쉬어가라고 널찍한 판들을 깔아 놓은 '십팔반'(十八盤)도 이 구간에 있다.
우리의 '정2품송' 일화와 비슷한 '5대부송'도 이 근처에서 만날 수 있다. 진시황이 등정 중 폭우를 만나 이 소나무 밑에서 비를 피했는데 이 관작은 그때의 답례였다.
홍문을 나선지 3시간 만에 드디어 남천문에 도착했다. 이곳은 등산로의 교차로이자, 케이블카의 종점. 광장은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북새통 속에서 이곳 전통 음식인 전병(煎餠)을 하나씩 나눠 먹고 천가(天街) 투어에 나섰다.
천가는 태산의 정상부 능선에 길게 늘어선 가로(街路)다. 호텔, 식당가, 도교사원, 기념품점부터 옥황정 근처의 모든 건축물이 모여 있다. 말 그대로 '하늘 타운'이다.
◆역대 황제들의 기도처 옥황정
중국 도교의 성지 벽하사로 향하는 계단을 오를 즈음 인파는 거의 절정을 이루었다. 중국의 5악 중 단연 압권임을 표시한 '오악독존비'(五岳獨尊碑) 앞에는 기념촬영 행렬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다.
오악독존비를 끼고 왼쪽으로 돌면 당(唐) 현종이 썼다는 '기태산명비'(紀泰山銘碑)가 나온다. 황제의 친필을 가깝게 보려는 욕심에 여기도 인파로 붐빈다.
드디어 옥황정에 발을 딛는다. 지존의 황제들이 유일하게 머리를 숙인 곳이며 민초들 기도의 최정점이기도 하다.
경내에는 향내가 가득하다. 분향은 기도자의 기원이 천신(天神)에 닿는 의식이다. 기원과 바람이 밴 수만 개의 자물쇠도 장관이다. 이 자물통 역시 민초들의 소원이 봉납된 성물이다.
향불의 기원들을 뒤로하고 일행은 하산을 서두른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3시로 접어들었다. 늦은 시간인데도 아직도 등정 인파는 끊이지 않는다. 그 행렬에서 작은 외경이 느껴진다. 향을 쥔 소녀의 손에 순례자의 경건이 묻어난다. 태산은 중국인들이 평생 한 번은 오르기를 소망한다는 대상이기에 그들의 마음가짐도 무척 낮다.
버스 유혹을 물리고 밑바닥 산행을 고집하는 것은 자신을 바닥까지 낮추기 위함이고, 삭도를 외면하고 7천 개 계단을 굳이 오르는 이유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기도요 독송(讀訟)이기 때문이다.
중국 태산에서 한상갑 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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