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희의 교육 느낌표] 그래도 힘들지?

입력 2014-10-21 08:00:00

"너, 떨어지면 한강으로 가야 돼."/"왜"/"창피하니까 빠져 죽어야지."/"정말 죽어야 돼."/"그럼"/귓볼이 빨갛게 얼은 겨울 날/언니보다 먼저 합격자 발표장으로 달려가/내 이름 확인하고는/"언니, 나 한강에 안 가도 된다!"/외치던 열두 살 목필균/여덟 살 위 언니는 지금도 놀린다./"넌 참 곰퉁이였다."/ (목필균의 '낡은 기억 속으로-중학 입시' 전문)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을 만났습니다. 소위 전교에서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입니다. 자부심이 있고, 내면적으로도 성숙하고 심리적으로도 안정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대화를 시작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깨졌습니다. 그 아이는 엄청난 우울과 불안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었습니다.

언어는 날카로웠습니다. 날이 선 아이의 말이 힘들었습니다. 1등을 해도 늘 당연한 것이었기에 그것으로 인한 행복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금 이 자리에서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가득했습니다. 불안감은 우울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소위 모범생이라는 것을, 자신이 똑똑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아픈 몸부림도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니가 이렇게 늘 1등을 하면 2등부터는 재미도 없겠다"고 농담을 했습니다. "그거야 자신들이 열심히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것 아닌가요?" 단호하게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2등부터 존재하니까 1등도 있는 거잖아. 그렇지 않니?" 순간 아이의 얼굴은 심하게 어두워졌습니다. 치열한 경쟁에서 낙오하여 절망의 늪에 빠진 아이들, 삶에 대한 자신감은 소멸되고 미래는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아이들의 얼굴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절망감. 아이는 결국 거기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시간이 흐르지 않아 아이는 자신의 얼굴을 다시 회복했습니다. 그게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습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의 닫힌 마음이 가슴 아팠습니다. 갑자기 어느 명문 자사고 학생이 자살이라는 것을 선택하면서 '머리가 심장을 갉아먹고 있다'고 남긴 글귀가 떠올랐습니다. 아이는 얼른 떠나고 싶어했지만 그대로 돌아서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슬쩍 물었습니다. "그래도 힘들지?" 결국 그 아이는 대답 없이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며칠 동안 아이의 얼굴이 마음에 남아 견디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어느 날, 긴 문자가 한 통 들어왔습니다. "선생님, 저 ○○입니다. 그날 죄송하고 고마웠어요. 제 마음과는 달리 선생님께 버릇없이 군 것 같아요. 저 사실 많이 힘들어요. 저를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하시는 부모님들을 생각하면 성적이 떨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이 가장 커요. 미래도 사실 답답하고요. 성적 문제가 아니라 '그래도 힘들지'라며 말을 건 사람은 선생님이 처음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제가 힘든지 모르나 봐요. 공부도 잘하고 집도 부유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봐요. 그런데 그게 가장 힘들어요. 초등학교 때까지는 책도 많이 읽었는데, 그래서 작가가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는데 지금은 그런 꿈이 다 사라졌어요. 그냥 공부하는 거지요. 다시 한 번 뵙고 싶어요. 선생님."

한동안 멍했습니다. 공부를 잘하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그들이 더 힘들 수도 있습니다. 성적도 성과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성과 위주로 사회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감정이나 정서가 숨쉴 공간은 없습니다. 사실 이 학생에게 현재 필요한 것은 성적이 아니라 친구들과의 연대와 교류입니다. 그것이 아이들이 지닌 우울과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연대와 교류를 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가르쳐야 합니다. 여백을 부여해야 합니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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