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논단] 아버지 없는 나라!

입력 2014-10-13 07:03:01

근자의 인문학 바람에 필자도 더러 대중강연에 나간다. 대중이 선호하는 분야는 동양고전이다. 와 와 이 인기 품목이다. 여러분도 가운데 나오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란 말을 아실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뜻이다. 공자의 이 말씀을 가지고 대중에게 아주 간단한 문제를 내본다. 아래 지문을 보시라!

'50대 중반 가장이 열흘째 야근하고 귀가한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귀가한 그는 해고 위험과 나이 어린 직장상사의 지청구로 인한 피로를 소주로 풀고자 한다. 그날따라 찬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하지만 냉장고에 소주는 없다. 그는 아내를 부른다. 50대 초반 아내는 전업주부다. 요즘 그녀는 카톡에 푹 빠져 산다. 얼마 전 알게 된 초등학교 동창 남친과 카톡으로 주고받는 얘기가 정말 재미있다. 그녀가 남편의 들고남에 신경 쓰지 않은 지 이미 오래다. 아내는 대학생 맏아들을 부른다. "소주 사와!" 20대 중반 맏아들은 학부 3학년이다. 그는 오래전부터 컴퓨터 게임 중독이다. 어떤 때는 몇 날 며칠이고 게임만 하는 경우도 있다. "소주 사와!" 하는 엄마의 말은 귓등으로 흘리고 중학교 1년생인 여동생을 부른다. 여동생이 우산을 쓰고 나간다.'

자, 여러분! 비 오는 그날 밤 50대 가장은 소주를 마셨을까요? 아니, 마시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소주를 마시지 못한 책임은 누구한테 있나요? 첫째, 아버지. 둘째, 엄마. 셋째, 맏아들. 넷째, 미성년자에게 술을 안 파는 국가.

이것이 필자가 던지는 질문이다. 놀라운 일이지만, 대다수 참가자는 아버지 책임이라고 대답한다. 아내나 아들 잘못이라는 사람은 드물다. 강요된 야간 노동과 언제 닥칠지 모를 해고 위험, 가족의 생계를 부양해야 하는 책임감으로 열흘의 야근과 인격모독마저 견디고 귀가한 아버지이자 남편을 냉대하는 식구들은 무죄란다!

고생했다는 인사는커녕 카톡질에 여념 없는 아내, 게임에 몰두해서 심부름을 떠넘기는 맏아들, 허탕치고 돌아오는 막내딸, 망연자실한 아버지. 대체 이런 집안의 가장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과도한 노동과 피로, 온갖 수모와 위협을 가까스로 참고 견디는 아버지의 지극히 작은 소망 하나를 들어주지 않는 이런 콩가루 같은 집구석에서 가장 노릇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오늘날 대한민국에는 아버지가 없다. 아버지의 권위나 존재 의의 내지 존립 근거도 나날이 희박해져 간다. 그래서일까. 근자에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40, 50대 남성 사망 원인 2위가 자살이라고 한다. 10년 연속 부동의 세계 1위를 자랑하는 자살률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지표가 40, 50대 남성의 높은 자살률이다. 무엇인가!

'안에서 새는 쪽박, 밖에서도 샌다!'는 속담이 있다. 집안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아버지가 밖에서 온전히 인간 대접을 받으리라 생각하시는가! 오늘도 어깻죽지 축 늘어뜨린 채 귀가하는 아버지에게 전하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인사 한마디, 정이 담긴 한 잔의 맑은 소주! 그것만으로도 한국사회는 얼마큼 환해지리라 믿는다.

공자 말씀에 따르면, 아버지가 소주를 사러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밤늦은 귀가 원인을 살필 때 누구보다도 대학생 자식이 용수철처럼 튀어나가야 한다. 그것이 자식된 최소한의 도리다. 그렇게 못 하니까 훗날 늙고 힘없으면 아들한테 천대받고 학대받고 얻어맞고 재산 뺏기고, 며느리한테 구박과 설움을 받는 것이다.

아버지도 한때는 열혈 청년이었고, 누군가의 빛나는 첫사랑이었으며, 앞길이 구만리같이 전도양양한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신언서판, 빠지는 구석 하나 없는 최고의 엘리트였다. 이제 아버지의 풀려버린 동공과 구부정한 등, 허연 귀밑머리를 보고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던지시기 바란다. 더 늦기 전에!

김규종<경북대 교수 노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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