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갈수록 일상의 일을 잠시 접어두고 아련했던 과거로 시간여행을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인다. 현재를 살지만 과거의 추억들은 우리의 마음서랍에 고이 간직되어 가끔씩 열린 서랍의 틈을 타고 그리움으로 흘러나온다.
지금부터 27년 전인 1987년 필자는 군 제대 후 복학을 위해 이화여대 앞 지인의 집에 하숙을 구해 들어갔다. 이사하던 첫날, 방 청소를 하다가 벽에 전 주인이 미처 떼가지 못한, 코팅되어 붙어 있던 편지를 우연히 발견하였다. 그 글은 방의 전 주인이 '미나'임을 짐작하게 하였고, 난 그 글이 당시 가슴에 꽂혀 벽에서 떼 27년째 보관 중이다. 편지를 다시 서랍에서 꺼내 읽어본다.
"미나에게. 우리가 도달하려고 하는 세계는 너무 험하고 멀어 때론 슬픔을 던져주고 때론 그리움을 피멍 속에 맺히게 하지. 그렇지만 만들어진 아름다움을 감상하기보다 그 아름다움을 낳은 깊은 슬픔과 그리움을 생각해 보자. 그리고 덜 만들어진 그 어딘가에 진실이 있다고 믿어보자. 너와 내가 서로 다 만들어진 딱딱한 껍질 속에 있었던 들 우린 그저 서로를 바라볼 수조차 없었을 거야. 차가움이 흐르는 완성된 대리석 조각의 아름다움보다 우린 완성을 향해 몸부림치는 피 흘리는 생명을 사랑하자꾸나. 사랑하는 친구 미나에게 미옥이가 말합니다."
나는 슬그머니 그 옆에 있는 또 하나의 편지를 꺼내본다. 약 4년 전 협심증을 얻은 필자를 생각하는 동안재의 글이다. 동안재는 필자가 20대 초 군복무시절 만난 평생의 절친이다.
"참 다행이네요. 그나마 빨리 발견하고 대처를 했으니. 기계라는 게 오래 쓰면 고장 나기 마련이지요. 유한한 존재임을 가슴으로 깨달으니, 품은 뜻과 하는 일이 더 절실해지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보네요. 스티브 잡스가 생각나네요. 동안재가 벗의 건강을 위해 부칩니다."
우리는 대리석 같은 완벽한 상대방을 만나게 되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가 품은 상대에의 열정 때문에 더욱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든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우정의 물줄기는 서로 무엇을 요구하기보다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주고 싶은 마음을 품게 하는 것이다. 믿음과 따뜻한 마음은 모든 시간을 재구성하고 모든 것들을 새롭게 변모시킨다. 그저 만나면 즐겁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는 진정한 친구라 말할 수 없다. 속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만이 인생의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참된 우정은 성숙한 인격과 배려를 바탕으로 한다. 성숙은 고요한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는 자세를 갖도록 만든다. 마음은 이러한 성찰과 행운을 담는 그릇이다. 지금도 난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해 향기 있는 편지를 보낸 '미옥'이란 분이 어떤 분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시인·수성구 부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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