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질서 재편의 현장 우크라이나 내전지역을 가다] <3>난민촌 사람들

입력 2014-09-26 07:02:09

"우크라이나 지지했다고 살해"…동부·크림반도서 수십만명 탈출

우크라이나 동부지역과 크림반도에서 탈출한 우크라이나인들은 키예프 외곽의 디마르카 난민촌(작은 사진)에서 모여 지내고 있다.
우크라이나 동부지역과 크림반도에서 탈출한 우크라이나인들은 키예프 외곽의 디마르카 난민촌(작은 사진)에서 모여 지내고 있다.
대학생 그레고리프와 그의 어머니는 크림반도에서 탈출해 디마르카 난민촌의 임시 거주지에서 생활하고 있다.
대학생 그레고리프와 그의 어머니는 크림반도에서 탈출해 디마르카 난민촌의 임시 거주지에서 생활하고 있다.
도네츠크를 떠난 변호사 발레리아 바르시니나(왼쪽)와 남편 드미트리가 끔찍했던 피해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도네츠크를 떠난 변호사 발레리아 바르시니나(왼쪽)와 남편 드미트리가 끔찍했던 피해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필자가 슬로비얀스크에서 키예프로 돌아오면서 탔던 야간열차의 대다수 승객들은 도네츠크와 루한스크에서 전쟁을 피해 키예프로 가는 난민들이었다. 이 지역에서의 전쟁은 전혀 예상치 못한 천재지변처럼 갑자기 발생해 이들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는지? 갑자기 전쟁이 일어나 집을 잃고 일자리를 잃어버렸다. 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뭘 잘못한 게 있어서? 왜 내가 다른 사람의 잘못된 행동과 결정으로 인해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도네츠크에 살면서 전쟁이 일어나기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새로운 직장을 구해 미래를 꿈꾸던 32세 된 엘레나의 한 맺힌 하소연이다. 키예프로 가는 열차 안에서 그녀는 갑자기 뒤바뀌어 버린 자신의 인생 역정을 담담하게 얘기했다. 평화롭던 도네츠크에서 갑자기 전쟁이 터지자 어렵게 얻은 직장은 문을 닫았고 겨우 몸만 빠져나와 지금은 키예프의 친척집으로 가는 중이다.

현재 키예프나 우크라이나의 서부지역에는 동부지역에서 온 많은 피란민들이 모여들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피란민들은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난민들처럼 보따리를 몇 개씩 들고 힘없이 걷는 불쌍해 보이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슈트케이스에다 여행객 차림으로 키예프 역을 오고 가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이다.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의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지역이나 크림반도를 떠난 난민들은 벌써 수십만 명에 달하고 있다. 유엔난민기구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숫자만 해도 동부지역에서 10만 명, 크림반도에서 1만4천 명이지만 이보다 훨씬 많은 피란민들이 삶의 터전을 떠났다.

필자는 동부지역과 크림반도에서 피란 온 난민(실향민)들을 만나기 위해 수도 키예프 시에서 40㎞ 떨어진 '디마르카' 지역에 위치한 난민 거주지를 방문했다. 난민들이 생활하는 건물은 현대식으로 지어진 단정한 건물로 누가 봐도 난민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깨끗하게 보였다. 물론 한정된 공간이어서 한 방에 대여섯 명의 식구가 머무르고 화장실이나 부엌은 모두 공용이었다. 난민들은 두 지역에서 왔는데 크림반도에서 온 60명과 도네츠크와 루한스크에서 온 70명으로 모두 130명이 살고 있었다. 대부분은 일시적으로 이곳에서 살다가 일자리를 얻고 거주지를 구하면 이곳을 나간다.

난민촌에서는 도네츠크에서 변호사로 일하다 난민이 된 발레리아 바르시니나(32)를 만나 상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발레리아 씨는 도네츠크에서 법대를 졸업한 뒤 6년째 변호사로 활동해왔고, 남편인 드미트리(32)는 작은 자동차 정비업소를 운영해오면서 자동차를 정비해주고 자동차 부품들을 판매해왔다. 넉넉한 생활을 영위하다 갑자기 난민 신세로 전락한 발레리아는 자신과 가족들의 인생이 바뀐 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4월 28일이었는데, 그날 우크라이나의 미래를 걱정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평화를 위한 기도회를 가질 예정이었다. 약 150명의 사람들이 모여 기도회 모임을 하던 중 400명의 친러시아 진영 사람들이 야구 배트와 각목, 쇠 파이프, 심지어는 총기를 갖고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남편을 비롯해 남자들을 무차별 공격하기 시작했고 남편은 온몸을 구타당한 뒤 쓰러졌고 일어나지 못했다. 어느 순간 나까지 각목으로 머리를 맞아 한동안 정신을 잃어버렸고 깨어나니 남편은 쓰러져 있었다. 당시 모임 장소는 아수라장이 됐고 구타를 당한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했다. 나는 남편을 병원으로 옮기려고 노력했지만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어 주위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병원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남편은 한 달 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 있어야 했고 아파트 주위에는 늘 친러시아정치집단(DNR)의 단원들이 주위를 서성거리면서 감시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이들의 위협으로 인해 더 이상 도네츠크에서는 살 수 없다는 판단을 했고 결국에는 가족들과 밤에 몰래 피란을 떠났다"는 것이다. 드미트리는 키예프의 병원에서 이미 네 번째 수술을 받았고 다섯 번째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드미트리는 자신의 삶의 터전이던 카센터를 그리워하면서 전쟁이 끝나 돌아갈 수 있기만 빈다고 말했다.

난민촌에서 만난 다른 가족은 크림반도에서 탈출해온 한 학생과 어머니였다. 미하일 그레고리프(20)는 심퍼로폴(Simferopol)대학 3학년에 재학하면서 학생서클의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의 인생을 뒤바꾼 사건은 지난 3월 9일에 일어났다. 1천 명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분리독립을 위한 주민투표(3월 16일)를 앞두고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모임을 가졌는데 그는 학생들을 동원하는 일을 담당했다. "부모님들은 러시아인이지만 자신은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인이며 당연히 크림반도는 우크라이나에 속해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주장했다고 한다. 모임이 있은 다음 날 대회에 참석했던 타타르민족의 한 청년활동가가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는 뉴스를 보고서 크림 지역을 탈출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만약에 크림 지역에 남아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것 같은가?"라는 질문을 그레고리프에게 던졌다. 그는 "만약에 그곳에 남아있었다면 체포돼 죽임을 당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크림 지역에서 우크라이나를 선호하면 그곳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그레고리프는 현재 키예프대학으로 이적해 9월부터 대학에서 계속 경제학을 공부할 예정이라고 했다.

현재 우크라이나에는 휴전협정이 발효 중이지만 여전히 긴장 기류는 계속되고 있고 언제 전쟁이 재발할지 모르는 분위기다. 그리고 휴전이 됐다고 난민들이 돌아갈 수 있는 분위기는 더더욱 아니다. 난민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 삶의 터전을 복구하고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날이 언제가 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글'사진 하영식 객원기자(국제분쟁 전문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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