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서-초보 농군 귀촌일기] 고추는 붉고, 가을이 맵다

입력 2014-09-18 07:19:28

비닐하우스 안에 심은 70포기 고추가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7월부터 지금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은 붉게 익은 고추를 따서 말리고 있는 중이다. 작년에 고추농사를 지어 본 경험으로 올해는 고랑과 고랑 사이를 넓게 만들어 고추모를 심었었다. 고추는 생각보다 크게 자라는 작물이어서 바짝 붙여 심으면 고추를 딸 때 무척 불편하다.

고추농사는 초보 농군에게는 하나의 작은 산이다. 미리 거름을 넣어둔 밭에 모종을 심은 뒤 고춧대를 세우고 나면 마음이 뿌듯해지는 것도 잠시다. 달린 고추마다 벌레 구멍이 생기고, 붉게 익기도 전에 노랗게 물러서 떨어지는 고추를 보고 있으면 속이 탄다. 고추 농사짓는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말은 '탄저'가 아닐까 싶다. 탄저병은 전염성이 있기 때문에 애써 지은 고추농사를 한순간에 망칠 수도 있다.

갖가지 병충해를 피해 간신히 붉게 익은 고추를 따게 되면 이제부터는 '고추 말리기'라는 더 높은 고지에 도전해야 한다. 고추농사를 처음 짓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연 그대로의 태양초를 만들어보겠다며 호기를 부린다. 하지만 온전한 태양초가 되기 위해서는 주인의 정성은 물론이고 꽤 긴 시간 동안의 맑은 날씨가 필요한데 고추를 말리는 시기는 보통 장마철과 겹친다. 거의 다 말라가는 고추도 사흘만 날씨가 흐리면 물러서 썩는다. 겉으로 보기엔 잘 마른 것 같아도 속을 잘라보면 곰팡이가 피어 있다. 이러니 귀촌한 사람 중에 고추농사를 한 해 지어보고는 두 손을 드는 경우가 많다.

작년에 곰팡이 핀 고추를 내다버린 양이 상당해서 올해는 비가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토담방에 불을 지폈다. 방 안 가득 고추를 널고 이틀쯤 불을 때고 나면 생각보다 고추가 잘 말랐다. 이제 고추 말리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좋아했지만 장마 기간이 길어지자 불 때는 일에도 지쳐갔다. 마침 뒷집에서 고추건조기에 자리가 남았다며 고추를 가져오라고 한다. 이틀 동안 건조기에 들어갔다 온 고추는 내가 한 달 이상을 마당과 토담방을 오가며 말린 것보다 훨씬 더 잘 말라 있었다. 매번 신세를 질 수 없는 노릇이어서 결국 가정용 건조기를 하나 구입했다. 따가운 햇볕과 맑은 바람을 이용해 순수 태양초를 만들겠다는 계획은 무너지고 건조기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쉽기만 하다.

한참 고추를 많이 따던 시기는 지났지만, 아직도 비닐하우스 안에는 고추가 익어가고 있다. 다섯 이랑밖에 되지 않는 고추밭엔 고추 가지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고, 그 사이사이 거미줄이 쳐진 곳도 많아서 여전히 고추 따기가 쉽지 않다. 텃밭에는 많은 벌레가 살고 있고 그중에 가장 고약한 것은 검은 모기들이다. 모기는 사람의 살갗이 보이기만 하면 물어서 텃밭에 들어갈 때면 긴 옷은 필수다. 그래도 모기가 물 곳은 있어서 텃밭을 나오면 목이든 발등이든 몇 군데는 퉁퉁 부어올라 긁곤 한다.

붉게 익은 고추를 골라 딸 때면 되도록 꼼꼼하게 따려고 애쓴다. 좁은 고랑을 왔다갔다하는 일이 귀찮고 힘들어서다. 하지만 다 땄지 싶어서 뒤돌아다보면 붉은 고추가 그대로 매달려 있는 경우가 더러 있다. 스쳐 지나온 고추는 가까이에서 봤을 때보다 더 선명한 빛깔로 주인의 손길을 재촉한다.

고추는 돌아가서 다시 딸 수 있지만 살면서 내가 놓친 것들은 다시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에 금방 마음이 아련해진다. 가까이 있을 땐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보이지 않아서 무심히 지나쳐온 많은 것들.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또렷해져서 때론 그리움으로, 때론 회한이 되어 앞으로도 오랫동안 내 걸음을 붙잡을 것 같다.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다 말고 눈앞이 뜨뜻해지는 것은 코앞의 청양고추가 맵게 익어가는 냄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운 것들이 많아지는 가을이 맵싸하게 다가온다.

배경애(귀촌 2년 차·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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