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으로] 현진건, 대구와 술과 가난

입력 2014-09-06 07:58:29

이달 2일, 출근길에 두류공원 인물 동산에 잠시 들렀다. 그곳에는 현진건 문학비가 있다. 1996년에 세워진 이 비에는 그의 단편 '고향'의 한 대목이 음각되어 있다. 그의 소설을 가만히 음미하고 있으면 생전의 모습이 마치 어느 술자리에서 뵌 구면처럼 우련히 떠오른다. 161㎝ 남짓한 키에 몸무게 53㎏ 내외의 아담한 몸집, 항라 두루마기 차림에 아장거리며 걷는 걸음새, 귀공자풍의 해맑은 얼굴에 여성처럼 곱상하고 복성스러운 이목구비, 주기가 오르면 매력적인 눈이 게슴츠레해지며 밉지 않게 건주정을 부리는 본새….

그가 대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의 부친이 대구부 전보사로 부임하면서였다. 그는 1900년 음력 8월 9일(양력 9월 2일) 지금의 중구 계산동에서 4남 중 막내로 태어나 1919년 당숙 현보운에게 입양되어 서울 종로구 관훈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대구에서 살았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서울, 일본, 중국 등지로 유학길에 오르기도 했지만, 주 생활근거지는 대구였다. 그리고 그가 동인지 '거화'(炬火)를 통해 처음 문학과 인연을 맺은 곳도 대구였다.

그는 문단에서 소문난 애주가였다. 그렇다 보니 자연 술에 얽힌 일화도 많다. 동아일보 사회부장 시절, 송년회 자리에서 사장 송진우에게 술을 권하다가 뺨을 때린 사건과 셋째 형 정건이 옥사 후유증으로 죽고 그 형수마저 자결하자 울분을 참지 못해 술김에 경찰관서에 찾아가 문을 부수고 일본인 순사에게 달려들어 모표를 떼는 등 행패를 부린 일화는 유명하다. 또 단골 술집 주모의 고무신을 버린 일화는 주객다운 풍모가 엿보인다. 일명 '치통집'이라 불리던 단골 술집에 간밤의 술이 덜 깬 상태로 그가 찾아오자 주모들이 부엌에 신발을 감추고 다락으로 숨어버렸다. 이를 거니챈 그가 부엌의 신발을 찾아 우물에 던져버리고 태연히 출근했는데, 화가 난 주모들이 동아일보 그의 사무실까지 찾아와 고무신을 물어내라고 난동을 부리는 통에 직원 몇몇과 함께 우물물을 다 퍼내어 신발을 찾아주었다 한다. 그렇게 술을 좋아했던 그였지만, 일단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몇 며칠이고 술을 끊고 밤을 새울 정도로 소설 창작에는 남다른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가난은 그에게는 그의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익숙한 생활의 일부였다. 생계는 부호였던 처가에 의탁하는 일이 있었지만, 가난을 벗고자 결코 비굴해지거나 불의와 타협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그가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생계를 위해 서대문구 부암동 잣골 일대 육백 평의 땅을 마련해 천여 마리(백여 마리라는 설도 있음)의 닭을 친 적이 있었다. 양계사업으로 형편이 좀 나아지자 예전의 주호기자(酒豪記者)들을 불러들여 제 집의 닭으로 볶음장하여 안주하는 바람에 다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짧은 일생에서 가장 큰 실수는 친구 꾐에 빠져 미두(米豆)에 손댄 일이었다. 그 사업으로 전 재산을 날리고 술로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44세(1943년)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일생 장편'단편 20여 편과 7편의 번역소설, 그리고 다수의 수필과 비평문을 남겼지만, 삶의 자취는 그의 호 빙허(憑虛)처럼 허공에 의지하고 말았다. 중구 계산동 그의 생가는 가뭇없이 사라졌고, 말년까지 살았던 부암동 그의 자택은 60여 년간 폐가로 방치되었다가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현진건 집터'라는 표석만을 남기고 철거되었고,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서초리 그의 유택은 도시 개발로 사라지고 유해는 한강에 뿌려졌다.

이달 2일은 그의 114돌을 맞은 생신이었다. 공교롭게도 올해는 태어나던 해와 음력과 양력이 일치해 감회가 새롭다. 불현듯 생각나 인물 동산을 찾은 것은 그를 기릴 공간이 그곳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연주/소설가·정화여고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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