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 개봉된 독일 영화 '타인의 삶'은 구 동독의 비밀경찰 슈타지(Stasi)가 시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저명한 예술가 부부의 감시를 맡은 슈타지 2인이 교대로 24시간 돌아가며 도감청을 했다. 이 영화는 실화에 바탕을 두었다. 독일 베를린에 가면 슈타지의 감시 기록을 가감 없이 볼 수 있는 방대한 문서보관소가 있다. 비밀경찰이 자신을 감시했는지 알고 싶은 시민이면 누구나 다 문서고에 열람을 신청하여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10월 말 미국의 국가안보국(NSA)이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핸드폰을 수년 간 도감청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미국과 독일 관계가 삐끗했다. 독일이 도감청에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흉측한 과거 유산을 청산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구 동독 정권의 조직적인 도감청, 그리고 히틀러 독재정권 치하 비밀경찰(게슈타포)의 그물망과 같았던 감시라는 유산이다. 이런 과거를 청산하고 민주적인 선진 복지국가를 이룩했고 맹방인 미국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미국의 자국 도감청은 이런 신의를 배반했다고 많은 독일인들은 여겼다. 독일 연방하원 정보위원회는 이 사실을 폭로한 미 국가안보국 에드워드 스노든의 임시 망명지인 러시아에 찾아가 그의 증언을 청취했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나서서 "앞으로 메르켈 총리의 핸드폰을 도감청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는 공개적인 발언을 한 후에 도감청 앙금이 잦아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 큰 일이 터졌다. 연방 하원의원들이 청취한 스노든의 발언을 독일 주재 미 중앙정보부(CIA) 요원들이 독일 정보기관 직원을 매수하여 정보로 사들였다. 지난 7월 초 이 소식을 들은 메르켈 총리는 베를린 주재 CIA 지부장을 추방했다. 독일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상당수의 독일 국민들도 미국의 이런 행동에 분노를 느꼈다. 미국과 독일 관계는 도감청 사건으로 냉랭하다. 일부에서는 독일의 이런 조치를 지나치다고 비판한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정보기관들이 긴밀하게 협력하여 테러를 사전에 저지한 적이 있는데 이런 협력마저 과민반응으로 쉽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독일의 대응을 지지하는 쪽도 만만치 않다. 독일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미국이 독일에서 한 것처럼 도감청이나 스파이 활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 반박한다.
도감청 사건을 보면서 미국에 '노'라 할 수 있는 독일의 힘을 느꼈다. 정부만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저력이기도 하다. 합리적인 비판을 수용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며 건설적 대안을 찾기 위한 비판이다. 메르켈 총리는 미국과의 관계를 매우 중시하는 정치인이다. 2006년 1월, 취임 후 두 달 만에 미국을 방문하여 전임자였던 사회민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공개적으로 반대하여 악화된 미국과의 관계를 복원했다. 2010년 단일화폐 유로를 사용하는 유로존 경제위기가 발발하면서 독일은 위기 해결의 선봉장 역할을 했고 이 과정에서 유럽통합을 함께 이끌어 온 프랑스는 물론이고 미국과도 긴밀하게 협력했다.
독일의 경제규모는 18개 유로존 회원국의 30%를 차지한다. 유로존 위기 해결 과정에서 독일은 적극적인 리더십을 행사해 왔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후 미국과 유럽연합은 러시아에 공동 대응하고 있다. 유럽통합의 지도자 역할을 하는 독일이기에 미국은 독일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통합 유럽 속에서 자국의 이익을 관철하고자 한다. 독일도 맹방인 미국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게 필요하다.
현재의 독일이 있기에는 미국의 역할이 컸다. 나치 정권을 괴멸시킨 미국은 독일을 점령한 후 탈 나치화'민주화'분권화 정책을 실시하여 독일(당시 서독)이 역사적 과오를 씻고 반성하게 하는 기틀을 제공해주었다. 독일이 당당하게 미국에 '노'라 할 수 있는 것도 미국의 독일 정책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독일 모델을 배우자는 열풍이 불고 있다. 통일 후유증을 극복하고 유로존 위기 속에서도 튼튼한 경제 체력을 과시하고 있는 독일 모델의 저변에는 굳건한 시민사회가 있다. 이를 무시하고 단순하게 경제 정책만을 모방한다면 이는 별로 효과가 없을 듯하다.
안병억 대구대교수 국제관계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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