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귀정] 명량, 그다음은

입력 2014-08-07 11:12:09

'명량'의 기세가 놀랍다. 개봉 8일 만에 700만 명이 다녀갔단다. 하루 100만 명을 넘긴 최초의 영화라는 기록도 세웠다. 지인들이 "없던 애국심도 생기더라"며 SNS에 관람기를 올리는 바람에 호기심이 먼저 극장 문턱을 넘었다. 해남과 진도의 좁은 바닷길, 물살이 빠르고 거세 마치 물이 우는 듯하다 해서 '울돌목'으로 불린 명량(鳴梁). 세계 해전사의 불가사의로 불리는 명량대첩이 우리 내면에 깊숙이 잠재된 '이순신 바람'과 만났으니 몇 백만 명은 약과일지도 모른다.

2012년 말 대선 무렵 '레 미제라블' 회오리가 몰아치더니 이번에는 '명량'이 시대를 흔들고 있다. 이 같은 쏠림 현상은 우리가 처한 현실이 왜란이나 권력의 폭압으로 어지럽던 시대와 다르지 않다는 날 선 감수성 때문일 것이다. 울돌목 거센 물살 위에 왜적과 마주한 이순신의 12척 배와 대한민국, 차별과 압제에 치를 떠는 민중들 앞에 다가선 혁명적 상황이라는 공감이 두텁게 작용해서다.

그래도 '명량'이라는 스크린 앞에 세대를 초월해 만들어진 긴 줄을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단순하게 '영화'에 방점을 찍는다면 이순신이 짊어져야 했던 역경과 인간적 고민, 시대의 질곡이 너무 처절하고 무겁다는 생각이 든다. 굴하지 않는 이순신의 용기와 소통, 리더십과 기적의 실체를 스크린을 통해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게 더 합당할 터다. 냉정하게 따져 보면 영화와 현실이 다른 점은 딱 한 가지다. 영화가 역사적 사실과 에피소드를 엮어 움직일 수 없는 결말을 투영하는 스토리라면 현실은 우리 손으로 직접 풀어야 할 숙제라는 점이 다르다. 영화는 벅찬 감동이라는 힘은 있으되 저절로 현실을 완성시킬 수 없다는 말이다. 영화는 메시지일 뿐 이를 풀어내는 추동력과 해법은 현실과 마주한 관객의 몫이기 때문이다.

야당의 한 중진 의원은 그저께 자신의 트위터에 '명량'을 언급했다. "2012년 대선에서 패배한 후 많은 이들이 '레 미제라블'을 보고 혁신을 말했다. 그런데 말로만 혁신했고 체질을 바꾸는 혁명적 개혁을 하지 못했다. 그 결과 올해 선거도 패배했다. 그리고 '명량'을 보고 우리는 이순신의 '사즉생 생즉사'를 말한다"고. 그의 말처럼 주체가 누구든 지금 우리 사회가 혁명적 개혁을 하지 못한다면 또 다른 영화를 넋 놓고 지켜보게 될 것은 분명하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부정과 야합, 차별과 폭력, 그리고 무능과 분노다. 세월호가 그렇고 22사단 총기 난사 사건, 28사단 윤 일병 폭력 사망 사건이 그렇다. 군'경 수뇌부가 옷을 벗고 대통령이 아무리 "일벌백계"를 외쳐도 영화의 틀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일 터지자 금배지들이 우르르 병영에 달려간 것부터 한편의 코미디다. 아무런 고민이 없고 바뀔 생각도 없는데 일벌(一罰)한들 백계는커녕 일계도 만무하다. 차분히 왜 우리가 울돌목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지 반성부터 하지 않으면 현실은 영화 속 하나의 에피소드나 장치에 불과하다. 벌써부터 이리해야 한다, 저리하는 게 맞다 등 온갖 해법과 훈수가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속담대로 '알기는 칠월 귀뚜라미'다. 일만 터지면 나오는 가시 같은 참견일 뿐 국민은 이미 귀를 닫았고 또 지긋지긋해한다. 또 이러다 말겠지, 뭐가 달라질까 자조만 들린다.

세월호 참사에서 우리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윤 일병 사건은 하나의 단편이자 연장선상이다. 하지만 훨씬 이전부터 우리 사회는 온갖 비리와 탐욕으로 만신창이가 됐고 차별과 폭력의 공포에 발을 헛디뎠다. 그럼에도 영화와 달리 언제 '엔딩'(ending)이라는 자막이 뜰지 가늠조차 못하고 있다. 현실이 우리 코앞에 들이민 무거운 메시지를 전혀 읽지 못하고 그냥 내팽개친 결과다.

그 무엇도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는 묘책(magic bullet)은 없다. '명량'이 보여주듯 우리라는 공동체의 교감, 스스로 움직이게끔 나 자신을 독려하고 모진 각오를 하지 않는 한 문화의 혁신도 인성의 일신도 없고 국가 개조는 뜬구름 잡기다. 원통한 죽음은 은폐와 축소로 얼굴을 바꾸고 부정과 부패는 민생과 정의의 그림자로 둔갑할 것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모진 바람벽 뚫고 나온 중방 밑 귀뚜라미'처럼 아는 법만 활개칠 뿐이다. 영화로 만족할 것인지, 현실을 바꿀 것인지는 이제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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