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속으로] 늦기 전에 돌아온 누님 김추자와 1969년

입력 2014-07-26 07:07:01

누군가 내게 청년의 나이로 살 수 있는 한 해를 선택하라면 기꺼이 1969년을 원할 것이다. 인류가 달에 위대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을 보고 싶고 대중의 자의식이 극에 달했던 우드스톡 페스티벌에도 한발 거들고 싶다. 또 비틀스의 마지막 레코딩인 애비로드(Abbey Road) 앨범의 초판도 사야겠고 폴 매카트니 사망설도 확인하고 싶다. 진정한 팝 음악의 시대를 열었던 엘튼 존의 솔로 데뷔 앨범이 공개되기도 했고 하드록의 시대를 열었던 레드 제플린이 첫 앨범을 낸 것도 1969년이다.

한국의 1969년도 좋다. 영국에서 온 클리프 리차드가 한국 여성들을 열광시켰고 한대수는 남산드라마센터에서 공연을 열어 한국모던포크의 태동을 알렸다. 그리고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말과 '돌부처도 그녀 앞에선 돌아앉는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신드롬을 일으킨 김추자의 시작도 1969년이다.

신중현의 페르소나로 데뷔한 김추자는 달랐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도발을 내세운 김추자는 신중현이 구상한 한국적 소울을 완성시켰다. 막 태동한 한국청년문화를 양분한 포크 음악과 함께 록 또는 소울이 보편적인 문화코드로 자리하는데 김추자의 역할은 상당했다. '늦기 전에'를 시작으로 '거짓말이야' '꽃잎' '님은 먼 곳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로 이어지는 히트 넘버들은 활동 시기를 온전히 자신의 시대로 만들었다. 빅스타에게 당연히 따라오는 스캔들 정도는 비웃을 만큼 별의별 가십거리가 많았던 김추자는 대마초 파동과 당시 유명했던 소주병 테러로 가요계를 떠나게 된다.

지난 6월 2일, 김추자는 33년 만에 새앨범 'It's Not Too Late'를 공개했다. 앞서 가진 기자 회견을 통해 신작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던 김추자는 6월 28일 서울 코엑스에서 컴백무대를 가졌다. 적게 잡아도 3천 명은 넘어 보이는 중장년의 관객들은 나름 멋을 부리고 공연장 입구에 모여 있었고 지나간 청춘을 소회하고 있었다. 누군가 애써 구해온 듯 청자 담배를 입에 물고 사진을 찍어대는 한 무리를 보며 묘하게도 '결핍'이 떠올랐다.

한국 대중음악의 특정 세대 쏠림 현상은 이미 1990년대 이후 지속된 현상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중장년층은 대중음악의 소비 시장에서 멀어져 있었고 그들의 시대를 공유했던 가수들은 추억 팔아먹기에 매몰되어 있었다. 어찌어찌 상업적으로 기획된 공연이 문화 현상으로 둔갑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결핍을 채우기 위해 공연장을 찾은 대중들은 이내 피로감을 느꼈고 현상은 해프닝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김추자의 컴백에 거는 기대는 달랐다. 공연에서 '김추자는 우리에게 자유를 알려준 사람'이라고 한 전인권의 말처럼 김추자는 시대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70년대 한국청년문화는 자유를 갈망한 시대의 현상이었다. 앞서가니 뒤서거니 하지만 비슷한 시기 세계 청년들은 자유의 실체로 대중문화를 선택했다. 대중문화에 관념을 부여했고 그 관념 안에서 순수한 정신을 구현하려 했다. 한 시대의 현상으로 여길법한 이런 모습은 적어도 대중문화를 유의미한 텍스트로 인정하는 곳에서는 다른 모습으로 진화했다. 재평가 또는 현재화라는 작업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과거는 비루하게 흘러버린 시간이 아니라 현재로 이어진 통로였다.

늦기 전에 돌아온 김추자의 앨범은 소망했던 1969년을 경험하게 해 준다.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밝혔던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기쁨을 맛보는 순간이다. 가능할지 모를 일이지만 1969년을 경험했거나 경험하고 싶은 이들과 자유로운 현재화의 버튼을 누르고 싶다. 참, 하나쯤 추가하자면 거장 마틴 스콜세지가 편집한 1969년 우드스톡 페스티벌의 기록 영화도 보면 어떨까. 제대로 자유의 시대를 확신하지 않을까 싶다.

권오성/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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