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활의 풍류산하] 익명의 섬, 가파도

입력 2014-07-10 13:58:44

가파도(加波島)는 익명의 섬 같다. 파도가 장막을 치고 있는 공연무대 같은 그런 섬이다. 해발 20.5m의 산이 없는 평평한 평지의 섬이다. 제주 모슬포항에서 남쪽으로 5.5㎞ 떨어져 있어 배로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름 그대로 물결에 파랑을 더해 주니 파도 치는 날이 많아 앙탈을 자주 부린다.

모슬포에서 가파도와 마라도를 선으로 이으면 밑변의 길이가 긴 이등변 삼각형이 된다. 다이아몬드 반쪽과 같은 세 개의 섬은 천혜의 자원을 가진 보고이자 늦게 각광받기 시작한 관광명소이다. 가파도는 한 발 살짝 뒤로 물러나 있는 잘난 체할 줄 모르는 섬이다.

우리나라의 최남단인 마라도가 TV에 출연한 이창명이란 개그맨이 '짜장면 시키신 분'이란 광고 멘트 하나로 갑작스레 뜨고 있어도 가파도는 물보라만 날리며 조용하게 앉아 있었다. 그렇지만 진흙에 박혀 있는 보석도 언젠가는 진가가 밝혀지듯이 가파도의 가치도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가파도는 제주 중에서 가장 제주다운 섬이다. 속으로 품고 있던 정서와 관습, 그리고 아직도 전설로 전해 내려오고 있는 때 묻지 않은 규범들이 늦게 정신 차린 어중이떠중이들에게 각성의 회초리 구실을 하고 있다. 마을 제단 구실을 하고 있는 할망당은 수백 년 묵은 역사의 현장이지만 쌓아 놓은 돌담들이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다. 무엇이든 버리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교훈은 없을 것 같다.

나는 수월찮게 제주를 들락거렸지만 가파도행은 이번이 처음이다. 삼류 영화관은 조조할인에 2본 동시상영도 가능하지만 마라도와 가파도는 동시상영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번 6일간의 제주 투어를 준비하면서 가파도를 1순위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생전에 가파도를 가보지 못하고 이 세상 소풍을 끝낼 뻔했다.

지난해 늦가을, 가파도 주변 해역에서 방어잡이 트롤링을 하자고 약속한 적이 있었다. 대구에서 첫 비행기 타고 제주로 건너가 배낚시를 두세 시간쯤 하고 오후 비행기로 돌아오는 당일치기 프로그램이었다. 하늘은 출발 하루 전날 무슨 심술이 났는지 모슬포항에 낚싯배 출항 금지 조치를 내려버렸다. 그래서 묵직한 손맛 한 번 보려던 꿈은 산산이 깨졌다.

방어낚시는 작은 낚싯배를 타고 달리면서 고기를 낚는 트롤링이 역동적이고 훨씬 재미가 있다. 헤밍웨이가 미국 플로리다 남단 키 웨스트에서 살면서 쓴 '노인과 바다'란 소설에서 보여준 고기잡이 방식이다. 그러나 가파 마라 해역에서의 선상 찌낚시도 물때만 잘 맞추면 긴꼬리벵에돔을 다문다문 건질 수 있어 수확은 오히려 나을 수도 있다. 이곳에 '방어 떼가 몰린다'는 소식을 상어 떼가 먼저 알고 덤비는 바람에 다른 어종들까지 뺑소니쳐 버렸다는 후문을 듣고 보니 낚시를 못한 것이 그렇게 섭섭하지는 않았다.

가파도에 들어간 게 4월 하순이었다. 청보리 축제가 열릴 시기였지만 세월호 추모 기간이어서 관광객은 평소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우리는 이날 아침부터 올레 7코스 외돌개 길 16㎞를 다섯 시간 걷고 난 후 점심도 굶은 채로 가파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막배는 오후 4시에 출항했다. 가파도에 머물 시간은 겨우 두 시간 남짓했다. 애초의 계획은 둘레길을 걸으며 이곳 막걸리에 해녀들이 따온 소라와 전복을 배부르게 먹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노닥거리기엔 시간이 모자랐다. 할 수 없이 5천원짜리 자전거 한 대를 빌려 타고 섬 일주에 나섰다.

빛 밝은 햇살은 투명한 명주 천을 하늘에서 풀어낸 것처럼 물거품 바다를 휘감았으며 살랑바람과 뭉게구름은 이렇게 멋진 날에 걸맞은 화음을 넣고 있었다. 할망당을 지나 큰 왕돌을 거쳐 장태코 정자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다시 냇골챙이 앞에서 개엄주리 코지로 들어갔다가 큰 용짓물로 나온다. 이름들이 하나같이 예쁘다. 바닷가에 있는 동항개물이란 일 년 사철 맑은 물이 솟아오르는 옛 빨래터는 볼수록 신기하다.

선착장으로 돌아오니 술 한잔 마실 시간이 남아 있었다. 마침 목로주점 춘자네 집(010-8805-7988) 살평상에 앉아 소주 한 병에 뿔소라회 한 접시를 주문했다. 밑반찬으로 나온 춘자 씨가 물질해서 따온 물미역과 가파도 명물 가사리 무침은 얼마나 맛이 있던지 "좀 더, 좀 더"를 연발하다가 배를 놓칠 뻔했다. 가파도는 붉은 놀 속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술 한잔 마시고 달과 별을 희롱하다 나도 모르는 새 잠들어야 가파도를 봤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이번 가파도에 진 빚을 다음번엔 일박이일로 갚아야겠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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