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품없어 수리 못해" 멀쩡한 제품 버리라는 업체들

입력 2014-07-05 08:00:00

소비재 부품 보유기간 권장 사항 지키지 않아

내구소비재 업체들이 규정된 부품 보유 기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소비자들의 피해가 커지고 있다.
내구소비재 업체들이 규정된 부품 보유 기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소비자들의 피해가 커지고 있다.

몇 해 전 혼수로 200만원을 주고 45인치 LCD TV를 장만한 주부 김모(34) 씨는 지난주 TV 화면이 나오지 않자 서비스센터에 수리를 맡겼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가관이었다. '해당 모델의 부품이 공급되지 않아 수리가 불가능하다. 부품 보유 기간까지 기간이 남았으니 감가상각으로 보상금 40만원을 지급할 테니 마무리 짓자'고 직원이 다그쳤던 것.

김 씨는 "같은 크기의 새 TV를 사기 위해선 최소 100만원 이상의 금액이 더 필요하다"며 "제도가 그렇다기에 수용했지만 소비자법규가 오히려 업체들의 면책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느낌이다"고 불평했다.

생활가전이나 IT 기기, 자동차 등 내구소비재 업체들이 규정된 부품 보유 기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소비자들이 멀쩡한 제품을 수리하지 못하고 폐기하는 피해를 입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내구소비재여서 통상 5~10년을 사용할 것이란 기대를 가지고 제품을 구입했지만 불과 몇 년 만에 '부품이 없어' 수리를 받지 못하고 '쥐꼬리' 보상에 울상 짓는 소비자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이럴 경우 '소정의' 감가상각 적용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할인쿠폰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자사 신제품 구매를 유도하는 판촉 수단으로까지 악용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소비자의 사후서비스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품목별로 의무 부품 보유 기간을 설정하고 있지만 권장사항일 뿐이어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컨슈머리서치가 2012년부터 올해 5월까지 소비자고발센터에 접수된 소비자 민원을 조사한 결과 부품 보유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부품이 없어 수리를 받지 못한 사례는 모두 432건이었다.

가전제품이 280건으로 가장 많았고 노트북 등 IT 기기가 118건, 자동차가 34건을 차지했다. 가전제품의 경우 TV가 120건(42.8%)으로 가장 많았고 냉장고 48건(17.1%), 세탁기 28건(10%), 청소기 26건(9.3%), 정수기 22건(7.8%), 전자레인지 18건(6.4%) 기타 18건(6.4%) 등이 뒤를 이었다.

IT 기기는 음향기기인 헤드폰, 스피커 등이 66건(55.9%)으로 1위를 차지했고 노트북과 PC가 42건(35.5%), 그 밖에 휴대전화, 디지털카메라, 블랙박스가 10건(8.4%)이었다.

자동차 관련 민원은 부품 수급이 어려운 수입 자동차 쪽(27건. 79.4%)에 집중됐다.

문제는 해마다 이런 피해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2012년 157건, 2013년 191건이던 사례가 5월 현재 접수된 민원만 84건이다. 소비자 피해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는 1차 원인은 제품들의 수명이 빨라지는 데다 비용 부담을 이유로 업체들이 단종된 제품의 부품을 제대로 보유하지 않고 있어서다.

강제 처벌 규정이 없어 피해를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공정위는 품목별로 가전은 6~8년, IT 제품은 3~5년, 자동차는 8년 등으로 부품 보유 기간에 대한 규정을 두고 있지만 권장사항이다.

부품이 없어 수리를 못 할 경우 제조사들은 잔존가치액에 최고 구입가의 5%(자동차는 잔존가치액의 10%)를 가산한 보상금을 주고 있다. 소비자들이 TV 세탁기 등 가전제품 구입 시 7~10년 사용 기대감을 가지고 구입하는 점을 감안하면 불과 4, 5년 만에 구입가의 절반도 못 건지고 제품을 폐기해야 하는 실정이다.

심지어 라이프사이클이 더 빠른 IT 기기 등은 '특별 할인' '보상 판매' 등의 명목으로 할인쿠폰을 건네주고 자사 새 제품을 구매토록 유도하는 판촉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자동차는 주행거리나 보관 정도 등에 따라 잔존가치가 크게 달라져 가전처럼 일괄적인 계산법도 적용하지 못한다. 소비자 분쟁으로 번지는 일이 허다하다.

컨슈머리서치 최현숙 대표는 "부품 보유 기간과 감가상각을 통한 보상 규정 모두 강제성이 없다 보니 소비자들만 무방비로 피해를 입고 있다"며 "부품 보유 기간을 의무화하고 부품이 없어 감가상각 보상을 할 경우 가산 비율을 높여주는 등으로 소비자 피해를 줄여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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