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세계를 향해 창문을 빼꼼히 연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기차와 증기선이 등장하면서 찾아온 '양행'(洋行)의 시대와 함께였다. 해외여행을 떠나면서 조선인들은 신세계와 마주쳤으며, 이를 기반으로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재편해갔다. 여행이 상대적인 자아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서구가 조선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에서 이제 조선은 서구가 제공하는 구경거리를 찾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인들의 관심은 여전히 자신이 그들에게 어떻게 보여 질 것인가에 머물러 있었다. 호기심은커녕 불편함이 두려움으로 변했던 것이다. 1896년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생전 처음 증기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넌 김득련의 일기에는 그런 과정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나이프와 포크를 제대로 사용할 줄 몰라 배가 고팠던 일이나, 밥상머리에서 여자가 함부로 떠드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커피를 마실 줄 몰라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흉내내다가 설탕 대신 소금을 넣었고, 케이크에 소금과 후추를 치고 겨자를 발라 낭패를 당하기도 했다. 버터를 꿀인 줄 알고 입안에 듬뿍 넣어 그대로 삼켰다가 구토하는 장면에 이르면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김득련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금발에 파란 눈을 지닌 서구인들에게 야만스럽게 보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발가벗겨진 몸뚱어리를 그들이 낱낱이 훑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서구식 매너와 조선식 예법은 '다름'이 아니고 '문명과 야만의 간극'이었다. 자기중심으로 세계를 읽어내려는 서구인들의 이분법적 세계관에 강요당한 것이었다. 구경거리가 된 자신의 모습을 알아차린 김득련이 이 난처한 상황을 수습한 방법은 다름 아닌 모방이었다. 다른 테이블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흉내 내는 것만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이런 행동은 어쩌면 조선의 근대화 과정과 그대로 닮았다. 남의 흉내 내기로 더 큰 시련에 봉착한 길 잃은 조선!
그들과 똑같이 하나가 되면 열등감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는 환상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세계화의 이념은 그런 심리적 결핍을 채워준다. FTA 같은 협약을 통해 비싸고 귀한 물건을 싸고 쉽게 살 수 있고, 먼 곳의 소식도 앉아서 들을 수 있는 지구촌 시대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강대국의 논리일 뿐이다. 인간은 저마다 독특한 풍경과 언어, 문화, 공동체를 가지고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인간으로서 우리가 존엄한 것은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이상 '다름'은 극복되어야 할 장애 요소가 아니다. 모두가 똑같이 되려고 발버둥칠 필요도 없다. 그런 세계화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서양문명의 핵심적 가치였지만, 그것은 우리만의 색깔을 포기하도록 요구한다.
요즈음 한국 사람들의 해외여행은 그 규모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이번 여름 휴가철에 인천공항에 몰리게 될 여행객들의 인파도 기록을 경신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행의 방식은 100년 전의 그것과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모습을 여전히 왜소하게 느껴 자기를 남의 구경거리로 만들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얄팍한 부(富)로 포장한 서 푼짜리 문명을 과시하며 서구를 흉내 내고 있기 때문이다. 명품 가방 구매를 여행의 목적으로 삼아 스스로 야만을 택하고 있는 졸부들이 그러하고, 야만을 구원하겠다며 용감하게 오지(奧地) 선교여행에 나서는 특정 종교인들이 그런 예라고 할 수 있다. 자본과 이데올로기로 침략을 정당화했던 제국주의적 행태의 재현이라는 혐의를 피하기 어렵다.
더 이상 빼꼼히 열린 창문을 통해 불안한 마음으로 세계를 기웃거릴 필요가 없다. 창문을 활짝 열면 세계는 그저 타자로 남아있지 않고 소통의 대상이 된다.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을 뛰어넘어 미지의 세계를 꿈꾸게 하고, 절대라고 믿고 있던 가치를 뒤집어주기도 한다. 자신이 몸담고 있던 경계 밖으로 용감하게 떠나는 일은 우리를 모방에 머무르지 않고 창조로 이끈다. 원효와 의상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었지만, 세계를 향해 창문을 열어젖힌 것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올 때 챙긴 선물 보따리는 '변화된 자아'였다.
김중순/계명대 교수·한국문화정보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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