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활의 풍류산하] 냉면 먹자

입력 2014-07-03 14:12:11

경상도 사람이 미식가가 되긴 어렵다. 지리적 여건이 음식과는 거리가 멀다. 성품 또한 굵고 강직하기만 했지 자상하거나 오밀조밀하지 못하다. 그래서 밥을 먹을 때 국과 된장 그리고 김치만 있으면 그게 끝이다. 경상도에 맞물려 있는 동해는 바다가 깊어 미각을 단련시킬 생선과 갯것들이 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갈치, 고등어, 가자미뿐이고 내륙 깊숙한 안동지역에선 비린내도 나지 않고 잘 변하지도 않는 문어를 양반고기로 취급할 뿐이다.

냉면만 해도 그렇다. 경상도 사람 중에 냉면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이는 드물다. "냉면 먹자"하면 "그래"하지만 냉면을 잔치국수의 아류쯤으로 생각한다. "무슨 냉면 먹을래"하면 "아무거나"라고 대답하는 이도 있다. "물냉면 먹을래, 비빔냉면 먹을래"하면 "너 먹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냉면이 나오면 미용실에 커트하러 온 사람처럼 가위질부터 해댄다. 그러니까 냉면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다는 얘기다.

냉면은 예술에 가까운 음식이다. 밑반찬은 달랑 얇게 썬 무김치 하나뿐으로 단순 소박하지만 얕잡아 봐선 안 된다. 제대로 된 냉면 육수를 만들려면 아무리 빨리 끓여도 1박 2일은 걸린다. 소고기 양지로 하든, 돼지고기나 닭고기를 삶아 육수를 빼든 간에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통상 시원한 맛을 내기 위해 기름을 걷어낸 육수에 동치미 국물을 섞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 또한 동치미를 맛있게 담가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냉면을 제대로 먹는 법을 차근차근 얘기해 보자. 먹기 전에 물을 마시지 않아야 한다. 면을 가위로 자르지 말아야 한다. 이는 송이를 쇠칼이 아닌 대나무 칼로 썰어야 하는 원리와 비슷하다. 쇠붙이가 음식에 닿으면 맛이 변하기 때문이다. 냉면은 찬물에도 붓기 때문에 10분 안에 먹어야 한다. 면을 먹기 전에 육수부터 맛을 봐야 한다. 면은 한입 가득 밀어 넣고 무식해 보일 정도로 씹어야 제 맛이 난다.

그릇이 식탁 위에 놓이면 삶은 달걀 반쪽과 계란지단, 배, 수육 등 고명은 육수 안으로 밀쳐둔다. 그런 다음 둥글게 말아둔 면사리를 젓가락 한 개로 중심을 찌르고 남은 젓가락을 열십자 모양이 되도록 찔러 그릇에 걸쳐둔다. 왼손은 면이 육수에 빠지지 않도록 잡아주고 오른손으로 식초를 면발 위에 듬뿍 뿌린다.

식초를 친 사리를 육수에 담근 후 겨자와 양념을 치고 고명을 고루 섞어 먹으면 된다. 마지막으로 남은 육수를 홀라당 마셔야 한다. 삶은 달걀 반쪽은 언제 먹는 것이 좋은지 더러 내기 거리가 되곤 한다. 달걀은 냉면을 먹기 전 육수 한 모금 마시며 맨 먼저 먹는 것이 좋다. 메밀의 찬성분이 위벽을 갉아대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위장 보호를 위해 미리 먹어야 한다. 양을 반 개로 줄인 것은 쓸데없는 포만감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흔히 평양식은 물냉면이고 함흥식은 비빔냉면으로 알고 있다. 금강산 관광길이 열렸을 때 온정각 금강원의 냉면은 모두가 물냉면이었다. 다만 함흥식은 감자 전분이 많아 가늘고 쫄깃한 회색이었으며 평양식은 메밀 함량이 많아 색깔이 검고 면발이 굵은 차이가 있었다.

나는 그동안 외금강, 내금강, 해금강까지 금강산 관광을 세 번이나 다녀왔다. 운 좋게 금강원에서 1인당 30달러짜리 풀코스 냉면을 먹어 본 적이 있다. 요리에 딸려 나온 들쭉술과 기쁨조 출신 아가씨들의 '반갑습네다'란 노래에 취해 전통 평양냉면 맛을 몽땅 잊어버렸다.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

나의 혀가 기억하는 몽매에도 잊지 못할 냉면은 백령도 사곶해수욕장 옆 사곶냉면집(김옥순'032-836-0559)의 황해도식 물냉면이다. 6'25전쟁 당시 황해도 주민들이 대거 백령도로 들어와 정착한 산물이 바로 냉면이다. 육수에 까나리 액젓을 넣어 진한 단맛을 낸 사곶냉면은 사리 한 타래를 덤으로 먹고 나서도 쉽게 젓가락을 놓을 수 없는 명품 냉면이었다. 주방 아줌마 중의 어느 누가 눈깜짝이라도 했으면 그대로 주저앉아 백령도 주민이 될 뻔했다.

나는 여름이건 겨울이건 냉면이 먹고 싶은 날이 있다. 기분 나쁘게 비가 오는 날이거나 정신이 황폐해져 모든 것이 우중충해지는 그런 날 냉면이 먹고 싶다. 기억의 바닥으로 내려앉고 싶기 때문이다.

백령도를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다면 한 달에 한두 번은 심청의 인당수 주변에서 놀다가 점심은 사곶냉면을 먹었을 것이다. 우리 뇌는 과거의 기억을 계속 아름답게 편집한다고 한다. 이러다가 내가 혹시 안 보이면 백령도로 이사 간 줄 알아라.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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