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윤희의 아담한 이야기] 생활의 달인

입력 2014-06-28 07:01:30

봄부터 작업하던 몇 권의 책이 한꺼번에 나왔다. 책이라는 물건은 참 오묘하다. 작업에 집중해 있을 때에는 보이지 않던 오점들이 책으로 형태를 갖추게 되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작업물이 나올 때가 되면 약간의 울렁증이 발동한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문득 내 안에서 들려오는 두려운 예감을 종종 갖게 되기 때문이다.

출판의 과정에는 개별적이면서도 다양한 공정과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를테면 글 쓰는 사람, 사진가, 일러스트, 편집자, 교열자, 그래픽디자이너를 비롯해 제지, 출력, 인쇄, 제책, 그리고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후 공정 종사자들까지. 그 일련의 과정마다 종사자들이 연결되어 동시에 하나의 미션을 바라보고 실타래를 풀어가는 것이다. 그중에서 어느 한 과정만 오류가 나더라도 그 충격은 일파만파이다.

그래서 출판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기획부터 디자인, 인쇄 전반의 공정에 대해서 속속들이 꿰고 있어야 한다. 저자와 독자층을 고려하지 않는 편집자의 아이디어는 공허하다. 저자와 사진가, 일러스트의 속내를 읽지 못하는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는 고루하다. 지류의 속성과 동떨어지거나 색감이 어색한 인쇄 작업은 그저 종이에 잉크를 묻히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첫 출발은 '책 만드는 일이 좋아서'라는 아주 단순한 생각과 '좋은 책을 만들고 싶다'는 선한(?) 의지가 전부였던 것 같다. 출발이 단순했던 것에 비해 감당해야 할 몫은 참으로 컸다.

사람은 때로는 망각의 힘으로 살아간다고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잊히기는커녕 더욱 선명해지는 몇몇 기억들이 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의 내 모습은 어쩌면 낙하산 상태를 점검하지 않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린 형국이었다. 손에 꼽을 수도 없을 만큼 하루하루 새로운 실수의 기록을 세웠다. 종이의 결을 미리 파악하지 않아서 책 모양새가 틀어지고, 인쇄선수가 맞지 않아 활자가 투박해지고, 종이의 느낌 하나에 매료되어 선택했다가 책의 도판을 망치기도 했다.

또 때로는 공정의 순서를 바꿔 진행하는 바람에 기계 대신 사람 손을 일일이 빌려야 하는 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같이 얼굴이 확 달아오를 일들이다. 그때마다 나를 바라보던 현장 종사자들의 눈빛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현장에서 만난 실무 종사자들이 문제의 진단과 처방을 한꺼번에 해결해주는 일도 많았다. 그야말로 경험 디자인의 내공이었다. 편집자의 확인이 끝난 후에도 자기만족이 될 때까지 인쇄선수를 맞추던 인쇄기장 A, 웬만한 디자이너보다 디자인 보는 눈이 더 뛰어났던 출력업체의 B, 매의 눈으로 제본 전의 치명적인 오'탈자를 잡아주던 C, 생산중단 된 종이가 꼭 필요했던 작업을 위해 국내외 지류를 샅샅이 뒤져 대안 종이를 찾아오던 D 등. 수십 년 동안 한 가지 일을 해오면서 나름의 '비책'을 체득한 그들이야말로 생활 곳곳에 숨어 있는 달인들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오랫동안 한 가지 일을 해 왔다는 것이고, 그 시간들이 그들의 자부심이라는 사실이다. 내 일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 그 일을 잘해 내는 비결은 없으리란 생각이다.

그들의 내공이 녹아든 책 몇 권이 지금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어느 시기까지 나에게 책의 주인공은 글을 쓴 이가 전부였다. 지금은 당연히 책의 주인공은 저자만이 아니다. 한 권의 책 안에 녹아 있는 숨은 주인공들의 노고도 함께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는 지난 6개월 동안 지극히 개인적일 수 있는 아담하고 소박한 책과 디자인에 관련된 '아담'(我談)을 끌어온 이유이기도 하다.

편집출판디자인회사 홍익포럼 대표 gratia-de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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