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매화 향기, 그리고 대학병원의 전광판 광고

입력 2014-06-26 15:32:24

퇴계 이황 선생은 매화의 시인이다. 매화를 소재로 삼아 지은 시가 전해져 오는 것만 100수가 넘는다. 퇴계 선생이 매화를 사랑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은은히 풍기는 매화의 향기, 즉 암향(暗香)도 큰 이유의 하나이다. 은은히 풍기는 향기. 그래서 암향이 유난한 날이면 퇴계는 밤새 매화 근처를 서성이며 달빛에도 젖고 암향에도 젖었다가 시를 남기기도 했다.

필자의 스승 중에도 유난히 매화의 암향을 발하는 분이 계셨다. 정년 퇴임을 하고도 지역 대학병원에서 석좌교수로 계시는 분이다. 그분은 필자를 성형외과 의사이지만 손 수술을 하는 전문의의 길로 인도해준 분이다. 대학 시절, 전공을 결정해야 할 무렵, "의사로서 보람을 느끼려면 쉬운 길을 가는 것보다 힘든 분야를 개척할수록 더 좋다"는 그분의 말씀이 필자의 오늘을 있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뿐만 아니라 많은 제자들이 그분을 인생의 스승으로 손꼽는다. 그분의 암향이 그만큼 넓고 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필자가 몇 년 전에 그분에게 큰 꾸중을 들었던 적이 있다. 병원을 막 개원했을 때의 일이다. 40대 후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시작한 개원이었던 만큼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잡고 싶다는 욕심이 앞서 택시와 큰 네거리 전광판에 병원 광고를 했는데 우연히 그 광고를 보신 선생님께서 일부러 필자를 부르셔서 "그런 요란한 광고는 의사가 할 일이 아니다"고 말씀하셨다. 환자 한 분 한 분에게 정성을 다하고 그 환자가 좋은 결과를 얻게 되면 환자가 곧 걸어다니는 광고판이자 홍보요원이 되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병원은 저절로 잘될 것이라는 게 그분의 말씀이었다. 요컨대 의사는 환자를 대하는 인품과 실력으로 알려져야지 광고로 알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은사님의 말씀 어느 한 곳도 틀리지 않았기 때문에 조급하게 생각했던 나 자신이 많이 부끄러웠다.

얼마 전 필자는 대학병원 전광판 광고를 보았다. 토요일에도 진료를 하고 무엇 무엇도 한다는 내용이었다. 마음이 착잡했다. 일반 병원이 전광판 광고를 하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 되었지만 의료 상아탑의 본산인 대학병원이 전광판 광고까지 한다는 것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고, 오죽하면 대학병원조차 저런 광고를 할까 하는 생각에 안쓰러운 마음도 컸다. "CT, MRI 등 이른바 돈 되는 검사는 다른 병원에서 다 받고 수술만 서울대병원에서 하는 경우가 많은데, 현행 건강보험 수가로는 수술만 해서는 병원에서 원하는 이익을 낼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우리 병원마저 '과잉진료'를 할 수도 없고…"라며 이미 학교 측으로부터 '진료 실적'에 좀 더 신경 써달라는 편지까지 받았다며 하소연하는, 한 서울대병원 교수의 얼굴이 전광판 광고에 오버랩됐다.

지난해 국립대병원 10곳이 적게는 11억원에서 많게는 251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서울대병원은 적자폭이 가장 커서 올초에는 진료 실적이 저조한 교수들에게 직접 서신을 보내 협조를 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의사의 실력이나 경영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가 아닐까 되짚어 본다. 게다가 올 8월부터는 선택 진료비에서 평균 35% 이상 환자 부담이 줄면 적자폭이 늘어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혹한에 얼어 죽을지언정 결코 매화는 향기를 팔지 않는다고 한다. 필자는 이미 병원 경영이라는 천형(天刑)의 짐을 짊어졌지만 필자의 주변에는 퇴계 이황 선생이나 필자의 은사님처럼 암향을 풍기고 싶어하는 선후배 교수와 의사들이 적지 않다. 눈 속에 피어나는 설중매만큼은 아닐지라도 한 가지에 하나의 꽃만 피우는 일지매처럼 살고 싶어하는 그들의 작은 소망은 진정 몽중매(夢中梅)일 수밖에 없을까. 토요일 진료를 한다고 대학병원마저 전광판 광고를 해야 하는 의료 현실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우상현/더블유 병원장 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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