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파괴하고 사랑하는 이를 앗아가는 '전쟁'

입력 2014-06-21 08:00:00

다시 생각하는 전쟁…전쟁의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

권태환 할아버지가 전쟁 때 받은 훈장을 꺼내 바라보고 있다. 훈장뿐만 아니라 케이스 조차 세월의 때가 잔뜩 묻어 있는 모습이다. 이화섭기자.
권태환 할아버지가 전쟁 때 받은 훈장을 꺼내 바라보고 있다. 훈장뿐만 아니라 케이스 조차 세월의 때가 잔뜩 묻어 있는 모습이다. 이화섭기자.
남용근 할아버지가 6
남용근 할아버지가 6'25 때 수류탄 파편에 다친 왼쪽 팔과 그때 받은 진단서를 보여주고 있다. 이화섭기자.
김남순 할머니가 보훈섬김이 남용숙 씨에게 전쟁 직후 힘들었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화섭기자.
김남순 할머니가 보훈섬김이 남용숙 씨에게 전쟁 직후 힘들었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화섭기자.

참전 용사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가슴에 번쩍이는 훈장이나 배지를 달고 전장에서 세운 공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습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아직 고통에 몸부림치는 힘 없는 노인들의 모습이 있다. 그 참상의 현장에서 보고 겪은 기억들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잊히질 않는다.

전쟁을 몸으로 겪은 권태환(84'대구 동구 율하동), 남용근(84'대구 서구 원대동) 할아버지, 전쟁 때 남편을 잃은 김남순(82'대구 남구 봉덕동)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는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애써 마음속 깊은 곳에 눌러두고 꺼내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워 자식들에게도 하지 않았던 전쟁 이야기를 다시 들어본다.

◆기억 꺼내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어…권태환 할아버지

권태환 할아버지는 전쟁이 일어난 지 한 달도 채 안 된 날인 1950년 7월 13일 입대했다. 바로 전쟁에 투입돼야 했기에 약 20일간 훈련받고 바로 경북 군위의 한 전선에 투입됐다. 이후 권 할아버지는 우리가 흔히 역사책에서 읽었던 국군의 진격과 중공군 개입, 1'4후퇴 등을 모두 겪었다. 1953년 7월 휴전이 될 때까지 권 할아버지는 죽는다는 생각조차 사치라고 할 만큼 치열하고 처참한 전투를 계속 겪다가 1954년 제대했다. 제대 당시 계급은 일등중사였다. 권 할아버지는 "상사 진급을 해 보지 않겠느냐"는 소대장의 권유를 뿌리치고 제대를 결정했다. 전쟁으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군복을 입고 적진과 마주하는 삶을 견디기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모습이 어땠느냐면…, 너무 초라했지. 훈련받을 때는 무기는 고사하고 옷과 군화도 전투에 투입될 쯤에나 받을 수 있었어. 그때 우리 몰골을 생각하면…, 그건 군인이라고 할 수 없었어. 전쟁 중이다 보니 군대 안에서도 인권이고 뭐고도 없었지. 늘 때리고…. 목숨도 함부로 다루는, 지금과 비교하면 정말 견딜 수 없는 '딴 세상' 같았어."

이후 권 할아버지는 대구에 정착해 목재 가공업 등 이런저런 사업을 하면서 자녀들을 키워냈고 모두 결혼시켰다. 자녀들을 키우는 동안 권 할아버지는 전쟁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떠올리기에 너무 비참했고 고통스러운 기억들뿐인 전쟁 때의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권 할아버지는 문갑 깊숙한 곳에 묻어둔 보자기 하나를 꺼냈다. 그 보자기 안에는 전쟁 때 받은 무공훈장이 있었다. 권 할아버지는 그 훈장에 대해 "내가 살아남았기 때문에 받은 훈장"이라고 했다.

"정말이지 전쟁은 절대 일어나선 안 돼. 생각지도 말아야 돼.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건데, 그게 얼마나 사람을 초라하게 만드는 건데…. 다신 일어나선 안 되는 게 전쟁이라는 거야."

◆꿈속에선 아직도 밀려오는 중공군이…남용근 할아버지

남용근 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뒤 이런저런 병마에 몸과 마음이 시달렸다. '과일 행상을 하면서 겨우 자식들을 키워냈다'는 할아버지는 "병원에 돈 갖다주느라 자식 공부도 제대로 못 시켜 마음이 항상 아프다"고 말했다. 전쟁이 끝난 뒤부터 건강했던 몸은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위가 아프더니, 폐렴도 꽤 길게 앓았다. 크게 아프지는 않아도 늘 여기저기가 아파 병원을 들락거리곤 했다.

남 할아버지는 "전쟁 꿈을 꾸고 나면 몸이 아프다"고 했다. 전쟁은 남 할아버지가 입대한 지 한 달 만에 터졌다.

"1954년에 제대를 하고 한 10년 동안은 전쟁 때 풍경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 꿈속에서 나는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 한가운데 있고 저 멀리 보면 중공군이 마구 밀려오고 있거든. 그렇게 꿈에서 전투를 치르고 일어나면 다음 날부터는 항상 몸 한쪽이 아파와. 그게 제대하고 10년 동안 그렇게 아파 버리니 돈을 제대로 벌 수가 있었겠나. 정말 번 돈 모두 병원에 갖다바친 셈이지."

남 할아버지는 전쟁 내내 벌떼처럼 밀려오는 인민군과 중공군을 상대해야 했고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겼다. 그래서인지 남 할아버지는 "전쟁 꿈을 꾼 날은 하루 종일 전쟁이 다시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린 적도 있다"고 말했다. 남 할아버지는 요즘은 그렇게 자주 전쟁 꿈을 꾸지 않지만 어쩌다가 6'25전쟁과 관련된 사진이나 자료를 보게 되면 전우의 시체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전투를 치러야 했던 당시의 끔찍했던 기억에 자꾸 눈물이 난다. 그럴 때마다 남 할아버지는 사람들을 만나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어떻게든 전쟁의 기억을 잊거나 가라앉히려 노력한다.

◆결혼 2년 만에 전사한 남편, 스물한 살 색시…김남순 할머니

김남순 할머니의 남편은 전쟁 발발 이듬해에 전사했다. 결혼한 지 두 해, 김 할머니의 나이 21살 때였다.

"난 그저 놀라고 슬플 뿐이었지. 집안에서는 '우리 아들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무슨 소리냐'며 '이거 우리 아들 아니다'라고 돌려보내려고 했지. 하지만 어쩌겠어,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게 아닌데…."

남편의 유골은 전쟁이 끝난 뒤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했다. 집안의 맏며느리였지만 자식도 없던 터라 시부모와 시동생들 뒷바라지하며 평생을 보냈다. 원래 집은 경주에 있었지만 시동생 중 한 명이 대구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가족 전체가 대구로 이사했다. 김 할머니는 점점 남편 얼굴이 가물가물하다. 사진이라도 보며 추억하고 싶지만 사진도 이사통에 잃어버렸는지 남아있지 않다.

김 할머니는 대문 틈에 끼어 있는 고지서를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 "또 무슨 무서운 내용이 있을지 모르겠어서"라고.

"전쟁 전에는 시집간 동네에 빨치산이 있다고 경찰이 날 잡아간 적이 있어. 시집 온 지 20일밖에 안 됐는데 어떻게 그 동네에 빨치산이 있는 줄 알겠어. 그래도 잡아가서 때리고 취조하고 그러더만. 그때 맞은 데가 지금도 아파. 국가에서는 '전사자 유가족'이라고 의료보호인가 뭔가도 지정해 줬다는데 그때마다 병원에서 진단서니 하는 서류를 떼 오래. 그것도 가끔 힘들고 지쳐요. 그래서 그런가 관청에서 뭐가 날아오면 겁부터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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