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正史, 삼국유사 野史 주장은 전형적인 식민사관"
"삼국사기는 정사(正史)이지만 삼국유사는 야사(野史)라는 주장은 더 이상 맞지 않습니다. 육당 최남선 선생이 그런 주장을 했는데 이는 전형적인 '식민사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삼국사기가 지배층 중심의 정치사라면 삼국유사는 민중 중심이라고 할 수는 없더라도 지배층과 백성이 함께 들어가 있고 정치뿐만 아니라 생활과 종교 문화 민속까지 아우르는, 풍부한 우리 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문화원형 콘텐츠의 보고입니다. 삼국사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三國)만 있다면 고조선과 부여 발해 가야 등 제대로 된 우리 고대 역사는 삼국유사에만 있습니다. 절대로 더 이상 '야사'가 아닙니다."
최광식(61'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지난 30여 년 동안 해 온 삼국유사 연구의 성과를 '삼국유사' 완역 역주본(3권)으로 대중 앞에 내놓았다. 2천여 쪽에 이르는 두께와 1천800여 개에 이르는 역주를 단 삼국유사는 학계의 다양한 최신 연구성과를 모두 담아냈다. 이 책이 20여 종에 이르는 기존의 번역본과 다른 점은 신라 고구려 백제 가락국 등 삼국시대의 역사적 기록을 '왕력'(王曆)편으로 따로 떼어 냈다는 점이다.
"수많은 설화와 전설, 민속 등이 들어 있지만 삼국유사가 민속 문화사나 야사가 아니라는 사실은 '왕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가 중앙 중심의 지배층 역사라면 삼국유사는 지방사료를 중심으로, 다양한 자료를 집대성한 '아카이브'(archive)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야사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진짜 역사입니다. 학계에서도 삼국유사에 좀 더 확실한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하긴 '반지의 제왕'이니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등 재미있는 외국의 문화콘텐츠는 물론이고 그리스'로마 신화 속의 제우스나 포세이돈 같은 신화 속 신(神)들이 더 익숙한 시대에, 삼국유사 속 우리 신화와 전설은 귀에 쏙 들어올 정도로 친숙하지 않다. 또한 삼국유사 '기이'(紀異)편과 흥법 탑상편 등에 기록된 다양한 신화, 설화, 민속 혹은 민간에 전승돼 온 이야기들은 아예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었던 '케케묵은' 옛날이야기 정도로 치부되고 있었던 것이 현실이다. 쉽게 읽을 수 있는 삼국유사 번역본이나 해설서가 없었던 것도 삼국유사에 대한 왜곡된 인식에 한몫했다.
그러나 이광수가 삼국유사의 탑상편에 있는 '조신(調信)설화'를 모티브로 소설 '꿈'을 썼듯이 이미 예전부터 삼국유사는 설화와 민속 등 우리 문화의 원형콘텐츠로 간주돼 온 것도 맞다.
최 전 장관은 "처음에 역주본을 준비하면서는 전공자들과 교양인들에게 한국 전통문화의 진수를 맛보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공직생활을 하며 '삼국유사'를 문화콘텐츠의 원형으로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더해졌다. 소설가나 드라마 작가, 애니메이션 작가들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원소스 멀티유스' 텍스트로 활용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가 삼국유사를 처음 접한 것은 대학(고대 사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지만 본격적인 연구에 나선 것은 대학원(석사과정)에서다. 효성여대(대구가톨릭대의 전신) 교수로 부임, 를 만들어 본격적인 삼국유사 '윤독'과 현장 답사에 나서게 되면서 그의 삼국유사 연구는 날개를 달았다.
"효성여대에 가게 되면서 삼국유사 연구모임, 이어서 전통문화 연구소를 만들었는데 가장 좋았던 것이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이 경산 태생인데다 삼국유사를 집필했던 비슬산 용천사라든가 군위 인각사 등이 다 학교와 가까이 있었습니다. 다녀오기가 편했다. 또 대구에서는 고대사 전공자뿐만 아니라 불교사와 미술사 국어학 유교불교 등의 사상사와 민속학까지 전공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었습니다."
최 전 장관이 1995년까지 10여 년간 대구에 머물렀던 기간은 삼국유사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킬 수 있었던 바탕이었다.
삼국시대 고대사 전공의 최 전 장관은 학자로 평생을 보냈지만 지난 이명박정부 5년 동안은 국립중앙박물관장과 문화재청장,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5년 내내 공직을 맡았다.
-고대사를 전공한 학자가 어떻게 국립박물관장을 거쳐 5년 내내 장관을 맡게 된 것인가.
"고려대 박물관장 때 북한의 고구려 유물을 가져와서 전시회를 하게 됐다. 그 당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주도한 '동북공정'에 맞서 정부의 '고구려사 대책위원장'을 맡아 국제심포지엄을 하게 됐다. 그때 서울시장이던 이명박 대통령께서 서울시에 고구려박물관을 짓기로 하고 나중에는 서울시 문화 관련 시정자문위원을 제게 맡기면서 인연을 맺게 됐다."
-5년 내내 공직생활을 한 것은 대단하다.
"국립중앙박물관장 때는 박물관 100주년 기념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면서 우리나라의 박물관 역사를 정립했다. 이어 맡은 문화재청장 때는 문화재청 50주년을 맞았다. 이어 G20 정상회의를 치르면서 박물관에서 G20 정상회의를 하면서 우리나라의 소프트 파워를 통한 국격을 높이는데 일조했다. K-pop이 뜰 때 문화부 장관을 맡았는데 한류 2.5시대를 주창하면서 한류를 다변화하는 데 앞장섰다. 제가 장관할 때 처음으로 외국인 방문객이 1천만 명을 돌파했다."
-이 시점에서 삼국유사를 내놓은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 각종 사극 등을 보면서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전설은 많이 참조하고 심지어 그리스 로마의 신들은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 건국 신화나 설화는 잘 모르고 있다. 우리 것이니까 꼭 알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화 시대에 우리 것도 아는 것이 진정한 세계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과, 공직에 있을 때 드라마 작가들과 만났을 때 가장 안타까웠던 것이 '우리에게는 참고할 만한 원천 소스가 별로 없다'는 푸념들이었다.
그때 저는 '무슨 소리 하느냐. 우리에게는 삼국유사가 있다'라고 반박했고 그러면 '한자로 돼 있어서 잘 모르겠다. 번역본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되돌아왔다. 공직을 그만두자마자 이 작업을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렀다. 써놓은 초고를 기반으로 후배 교수가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각주로 살을 붙여 내놓은 것이다."
-삼국유사는 사실 대중적일 정도로 친숙하지 않다.
"그렇지 않다. 삼국유사는 문화'민속사이면서 불교사다. 신화와 설화 문화 민속 이런 것들이 다 들어 있다. 어렵지 않다. 우리나라 스토리텔링의 원천이 바로 이 삼국유사다. 일반인들이 삼국유사를 볼 때는 원문 번역본을 먼저 보고서 하나씩 알고 싶은 역주를 되짚어보면 좋겠다. 왕력편은 일반인이 처음부터 볼 필요는 없다."
-삼국유사는 신라 중심의 역사 문화서라는 평가도 있다.
"왜 그러냐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있는데 고구려 백제가 먼저 망했다. 신라는 천 년을 이었다. 삼국유사를 쓸 당시에는 시간상으로 남아있는 자료도 신라 중심이었을 것이다. 일연 스님도 경산에서 태어났고 주석하신 곳도 비슬산 인각사 운문사 등 다 경상도 쪽이다. 참고했던 자료들이 다 사찰에 남아있던 자료이자 지방사 자료들이다. 삼국사기는 중앙 자료를 중심으로 쓰였다면 삼국유사는 지방에 있던 자료가 중심이다. 무엇보다 삼국유사는 아카이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로서의 가치도 더 뛰어나다. 원자료를 그대로 남겨둔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크게 주목했던 대목이 있나,
"제가 제일 주목한 부분은 감통(感通)편 권5에 있는 '선도산(仙道山) 성모 수이불사조'라는 대목이었다. 석사논문의 주제이기도 했는데 지혜라는 비구니가 불사(佛事)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재원이 없어서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선도산 성모가 나타나서 어디 밑을 파보면 금이 나올 것이다. 그 금으로 불사를 일으켜라. 절을 지으면서 불(佛) 보살과 더불어 오악(五嶽) 신군을 함께 모셔라라는 이야기가 있다.
오악신군은 사실 산신인데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이전까지는 불교와 민간신앙의 결합이 조선시대에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승려들이 도성에도 못 들어가게 되면서 생활이 어려워져서 구복신앙을 결합, 산신각을 지었다는 통설이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보면 이미 불교가 들어온 삼국시대에 이미 불(佛) 보살과 산신을 같이 모시는 융화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조선이 아니라 불교 도입 초창기부터 불교가 토착 신앙과 다소 마찰을 일으키면서도 공존해 온 것이 한국불교의 특징인 셈이다."
-민간 설화를 지나치게 많이 기록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신화와 전설은 우리 정서에 와 닿는 부분이기 때문에 정말 소중하다. 삼국유사의 그것이 없다면 한국문화의 특징을 얘기할 만한 것이 없다. 제가 동북공정에 대항해서 고구려사 대책위원장 맡을 때도 삼국유사가 진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삼국사기만 있었다면 우리 역사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밖에 없다. 그런데 고조선과 위만조선 기자조선 부여 발해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삼국유사밖에 없다. 진짜 제대로 된 역사는 삼국유사다. 이게 정사가 아니면 무엇인가."
-이어서 준비하는 것이 있는가.
"오는 7월 5, 6일 군위 인각사에서 1박2일간 삼국유사 현장답사 겸 강연을 하기로 돼 있다. 이처럼 앞으로 삼국유사 현장을 찾아가서 문화강좌도 하고 현장에서 삼국유사를 느끼는 역사기행을 했으면 좋겠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황룡사탑이 있던 자리에 가서 삼국유사 내용을 확인한다든지 말이다. 그것이 모이면 또 다른 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최 전 장관은 올 하반기 실시되는 고려대 총장 선거에 도전하는 행보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돌아왔을 때는 이 삼국유사 프로젝트에 발목이 잡혔다. 그러나 이제는 저의 공직경험이 학교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유로 출마를 권유를 받고 있다."
서명수 서울정경부장 didero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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