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서-중국동포 한국 생활기] 사탕, 우리들의 옛 고향 이야기

입력 2014-06-05 14:05:47

"가락을 빼고 올올이 켜내는 그녀의 손놀림은 재다. 색소도 향도 넣지 않은 순 입맛은 상큼하고 순수하다. 손매며 손맛이다."

사탕 하나하나에 그녀의 정성 어린 손길이 꼭꼭 어린다. 자로 잰 듯 끊어내는 것도 눈어림이고 설탕을 끓일 때의 시간도 눈어림이다. 사탕이 졸여지면 입 짐작으로 감도도 척척 맞춰낸다. 알사탕이 늘어날수록 서로 붙지 않도록 흩어줘야 한다. 쌍둥이요, 삼둥이요 하는 말들이 이때 조심하지 않아 나타난다고 그녀는 설명한다. 그런데 나는 어렸을 때 쌍둥이나 삼둥이가 나타나면 그것만 골라 갖고 소꿉동무들한테 자랑하고 똑 떼어서 나눠 먹던 생각이 난다.

그녀는 어깨와 허리가 아프다. 멍에를 지고 하루 종일 정직하게 일해 왔던 우리 집 황소도 목이 아팠을 것이다. 소처럼 잠깐 휴식을 청해 누웠다가 다시 일을 시작한다. 43㎏밖에 되지 않는 체중의 그녀는 그야말로 사탕에 삶 전부를 걸었다. 사탕은 어쩜 그녀의 자존심이고 사랑이고 행복이고 그녀의 풍경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사탕으로 인생 방향키를 틀게 된 것은 학원에서다. 수중에 돈도 넉넉지 않을 때 두 딸에게 사탕을 간식거리로 만들어주려고 시작한 일이었다. 친구들에게 맛보라 권했는데 모두 고향 맛이라고 칭찬을 했고 팔아도 되겠다는 한마디를 했다고 한다.

그 한마디에 감이 와 그녀는 부업거리로 시작했다. 교회 다니는 한국 어르신들한테도 권했더니 옛 맛이라면서 그녀를 다시 돌아봤다고 한다. 재중동포인 나에게도 그리운 추억이다. 어려운 살림 그때 누구의 잔치설거지로 간혹 알사탕을 얻어먹곤 그렇게 신날 수가 없었다. 개 눈깔만 해서 개눈깔사탕, 흰줄이 쭉쭉 갔다고 해서 알락사탕이라고도 했다. 동글동글한 사탕을 호주머니에 감춰놓고 아껴 먹다가 호주머니 바닥에 다 녹아 붙어버려서 얼마나 안타깝던지.

알고 보니 그녀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둔 채 오갈 수 없는 두만강 이쪽저쪽에서 살아왔던 고향 이웃이었다. 이미란 씨, 지금은 새터민이라는 연민에 기울었음이다. 새터민들이 적응하는 과정은 각자 달랐다. 그녀의 사탕처럼 이북식 순대나 떡이나 냉면이나 김치, 그리고 이북 가요로 그들은 나름의 끼를 펼쳤다. 강원도에서 새터민이 꾸린 냉면집은 사계 없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쾌거를 이루고 있다고 하니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서서히 이북이라는 낱말로 이색적인 승부수를 던지는 것이다.

다시 동년 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그녀의 손맛에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무엇보다 고향사람들이고 옛 전통을 고집하고 사랑하는 동포들이다. 그녀는 각고한 살림 때문에 이북 평양 곡산공장에서 퇴직한 선배한테 사탕 제조기술을 배우고 3년 동안 도둑장사(개인장사 허용되지 않음)도 해왔다고 한다. 훗날 한국에 와서 그것이 계기가 되었고 할 일이 생겨 고마울 따름이다. 술고래 남편을 고향에 두고 떠나온 맘이 허전하고 눈물겨울 때, 타향살이에 적응하는 과정이 힘들 때 자기 할 일이 생겼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고 맘을 다스려가는 착한 노동이다. 그리고 거기에 후반 생을 걸었다. 그녀가 만드는 사탕은 맛이 순수하고 깔끔하고 구수했고 특히나 우리 전통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전통은 살 만한 세상 때문에 사라져간다. 사탕이라는 것도 없을 때 이야기지, 편하고 생산적인 현대에서는 오히려 충치를 유발시키는 요인으로 별로 인기가 없다. 우리 삶도 달기만 한 것이 아니다. 쓰고 시고 맵고 떫은 인생 맛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고향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그녀의 피치 못할 사정도 이 맛이었을까.

그녀와 작별하는 시간 그녀는 가끔 바자회에도 북한사탕이라는 제목으로 상품을 선보이고 낱개로 포장해서 내놓는다고 한다. 상품이 아니고 전통이고 우리 멋이다. 먼 훗날 제2 인생으로 여유가 생길 때 달동네나 노인정을 찾아 봉사도 하고 싶다는 그녀의 포부가 미더웠다. 삶을 희망적이게 하기 위한 그녀의 노력은 야윈 몸에서 더 아련하게 느껴진다.

류일복 (중국동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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